코로나 난민의 제주표류기 ③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예약해둔 호텔로 갔다. 가족들은 2주 후에나 만나기로 했다. 내 기침이 감기인지, 천식인지, 코로나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을 때, 그 세 가지의 가능성중 코로나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히 판명될 때 엄마든 언니 가족이든 만나기로. 호텔에서 열흘 넘게 있는 동안, 매일 열을 쟀고, 열은 없었고, 기침은 조금씩 줄었다. 1339에 전화를 했지만, 코로나 검사를 받을 필요는 없다는 대답을 받았다. 매일 불안한 채로 호텔에서 격리를 했다.
삼시 세 끼를 배달음식만 먹을 수는 없어서, 하루 한 끼는 호텔 백 미터 반경 안의 식당에 갔다. 혹여 내가 감염자라면 주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주로 같은 식당을 이용했다. 가끔씩 호텔 리셉션에서 전화가 올 때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우리가 중국에서 온 것을 알고 호텔을 나가라고 하는 건 아닐까. 어딜 가도 지레 눈치를 보았다. 상하이에서 왔다는 것이 낙인처럼 느껴졌다. 하루라도 빨리 병원에 가보고 싶었지만, 그 어떤 병원도 중국에서 온 이를 받아주는 데는 없었다. 상하이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모든 친구들의 병원 예약이 취소되었다. 공식적으로는 2주였지만, 중국에서 온 한국인들은 한 달 넘게 병원에 가지 못했다. 특히 나 같은 호흡기 환자는 더욱더.
호텔 격리가 의무사항은 아니었지만 불안한 마음으로 열흘 이상을 채우고선, 언니네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다시 자체 격리. 남편한테는 감기조차도 옮지 않았고, 격리도 충분히 했지만 '혹시나'라는 생각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상상 코로나'가 찾아온 것 같다. 혹시 남편이 무증상 감염자는 아닐까. 내가 코로나 확진자가 아니라는 걸 누구도 증명한 적은 없잖아? 학원을 운영하는 언니네에게 피해가 되지는 않을까. 학원은 네 가족의 생계인데. 우리를 받아준 언니에게 혹여 폐가 될까 싶어 학원 근처는 몇 달간 얼씬도 하지 않았다. 상하이에 산다는 이모가 갑자기 학원을 드나든다는 이야기가 수강생 학부모에게라도 들리면 좋을 게 없으니까. 호텔에서 나오고서도 남편과 나는 집에만 머물렀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던 기침은 사라졌지만 가슴이 때때로 답답했다. 병원에 가고 싶어도 여전히 나는 병원의 불청객이었다.
남편은 두고 온 업무 때문에 3월 초에 상하이에 돌아가기로 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남편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신천지 집단감염'이 터졌다. 중국은 사회주의답게 국가의 통제로 코로나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상하이의 패닉은 거의 사라졌고, 모든 식료품과 신선식품이 정상적으로 유통되었으며 모두들 다시 일상을 찾아갔다. 국가의 통제로 재택근무를 시작하고, 개인의 건강을 수치화하는 QR코드도 생겨났다. 모든 건물의 출입구에서는 QR코드를 검사했고,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건강한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그린카드'를 내밀면 어떤 곳도 출입이 가능했다. 그때 한국발 승객들은 모두 '오렌지카드'를 받았다. 시설 격리 혹은 자택격리를 무사히 마치면 그린카드로 바뀌었다.
중국에서 갑자기 신천지 동영상이 돌기 시작했다. 상하이의 많은 친구들이 신천지 동영상을 보내며 '이게 사실이냐'물었다. 동영상 중에는 '코로나에 걸려 죽는 게 목적'이라는 광화문 집회의 극우 개신교 목사 동영상도 있었다. 중국은 한국발 입국자들의 심사를 강화했다. 다시 매일 실시간으로 중국으로부터 뉴스가 날아왔다. 여전히 가짜 뉴스와 진짜 뉴스가 구별되지 않았고, 날마다 입국자에 대한 규정이 바뀌었다. (더 강화되었다)
남편이 돌아간 후, 신천지와 극우 개신교들의 영상이 돌 때쯤 중국에서는 '혐한'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한국인들이 입국해서 격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 한국인이 다시 중국에 와서 바이러스를 퍼뜨린다는 이야기들. 누가 이 바이러스를 태초에 퍼뜨렸는지는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어느 나라에서 바이러스가 창궐하면 그 나라에 대한 공포심과 혐오가 몰렸다. 남편이 비행기를 탄다 해도 집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모든 아파트는 '주민위원회'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아파트에 돌아오는 모든 이들을 관리했다. 특히 외국인들, 집으로 돌아와 격리를 잘하고 있는지. 하지만 아파트의 커뮤니티에는 외국인 누군가가 격리기간을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주민위원회를 통해 다시 격리되었다는 소식이 매일 올라왔다. 특히 서양인들이 '마스크를 쓰지 않으므로 특별히 조심하라'는 이야기와 함께.
같은 아파트에 사는 (중국인) 친구에게 부탁을 해두었다. 혹여 무슨 일이 생기면 도와 달라고. 친구가 없었다면 남편은 상하이 입국 날, 길에서 밤을 새워야 했을지도 모른다. 공항에서는 무사히 통과했지만 아파트 주민위원회의 당직자가 '(위험한) 한국인을 임의로 들여보낼 수 없다'고 했다. 남편은 화를 내지도, 집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구를 할 수도 없었다. 한국이 이미 바이러스 창궐 국가로 낙인찍혀 있었으니까. 그때 나에게서 긴급하게 연락을 받은 중국인 친구가 아파트 정문으로 출동해주었다. 밤 열한 시가 넘은 때였다. 친구는 당직 직원과 한 시간쯤 네이티브의 유창한 중국어로 싸워 주었고, 마침내 그의 보증으로 남편은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3월 4일의 긴박했던 밤. 우리는 상하이를 떠나온 순간부터 고국에서도, 타국에서도 '위험한 부류'에 속하는,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였다. 하지만 우리를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우리도,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불운은 그저 모두에게 찾아온 것이니까. 남편에게 다시 긴 격리가 시작되었지만, 집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이제 내게도 모든 불안은 끝이 났다. 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