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닉어택이 온다고 죽지는 않는다'

코로나 난민의 제주표류기 ⑤

by 연필소녀

"내 몸은 지난 감정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원인은 (당연히) 그동안의 불안과 긴장 때문이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때는 몸도 흥분상태라 무엇도 느끼지 못하다가, 긴장이 풀린 어느 날 갑자기 작은 계기로 (바닷가에서 삼겹살 가족이 내는 검은 연기 같은) 패닉 어택이 오는 것이다. 그것으로 내 정신에게, 내 몸의 상태를 알리는 것이라고.


네 몸은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은 척하고 있는 것이다. 패닉 어택은 몸과 마음을 챙기라는 강력한 신호였다. 나의 공포스러웠던 입국과 격리생활, 그리고 '남편의 중국 입국'으로 다시 시작된 불안. 내 집이 아닌 곳에서의 기약 없는 체류. 불청객이 되어버린 신세까지 모두 겹쳐, 내 자율신경계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일을 모두 겪고 '패닉 어택'이 온 것은 느닷없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고생 많았다며 선생님이 처음으로 '위로'를 해주었다. 생각해보니 누구에게도 내 파란만장했던 입국의 심정을 말한 적 없었다. 언니에게도 엄마에게조차도. 위로를 받을만한 일이었는데도. 내 마음이 극도의 공포에서 간신히 버텼는데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말해주었다. 평생 한 번도 겪지 않을 일을 겪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잘 왔다. 이제 같이 극복해보자고. 죽음을 코앞에 두고 구원을 받은 것 같았다.


언니 집에 돌아와 빈집에서 몇 시간을 울고서야 마음이 진정되었다. 몸을 덜덜 떨며 기침을 하는 상태로 공항 가는 택시를 탈 때의 심정, 호텔에서 쫓겨날까 두려웠던 마음, 중국에서 온 사람은 진료를 하지 않던 병원들, 패닉 어택이 왔던 순간 죽음의 공포, 매일 밤 눈을 감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못이루던 날들, 중국에서 왔으니 내년까지는 만나지 말자던 친구들의 장난 섞인 말조차도 상처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IMG_2913.jpg 비 오는 날, 언니 집 거실 통창에서 보이는 풍경을 좋아한다. 특히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을 때.


"패닉어택이 온다고 결코 죽지 않습니다. 꼭 기억하세요"


원인은 스트레스지만, 결국은 '자율신경계'의 균형이 깨지면서 나오는 '몸의 증상'이었다. 교감신경의 흥분으로 심장이 빨리 뛰고, 조여 오고, 불규칙하게 뛰는 것. 사실 맥박을 재면 늘 정상이었다. 알고 보니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심장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었다.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찾으며, 교감신경을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교감신경을 흥분시키는 일체의 것(커피와 차, 불면 등의 모든 것)은 금지되었다.


선별진료소에서 내 바이탈이 왜 정상이었는지, 매일 밤 죽음이 코에 닿았지만 왜 절대 죽지 않았는지 알았다. 힘들 때에만 찾는 신에게 매일 기도해서가 아니라, 패닉어택은 절대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내 눈에 정확히 박히도록 시선을 고정하고 말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조일 때마다 반드시 기억하세요, 패닉어택이 온다고 절대 죽지 않는다는 걸요. 그 말은 의사 선생님의 입을 빌어 신이 내려준 약속 같았다. 그 말을 가슴에 새기는 것만으로도 죽음은 저만치 멀어졌다. 지금도 늘 그 약속을 되새긴다.


처방받은 약을 단 일주일 먹었는데, 증상의 80% 이상이 사라졌다. 이럴 수가. 이렇게 숨을 쉴 수가 있다니.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죽음은 코앞까지 왔다 사라졌다. 숨 쉴 수 있다는 게, 내 심장소리를 듣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무엇보다도 내 감정의 독을 서서히 빼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친구나 가족, 남편에게도 차마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약 처방과 함께 응원까지 해주는 사람. 살면서 한 번도 만날 일 없을 줄 알았던 정신과 선생님. 그제야 남편에게, 그가 떠난 후 겪었던 모든 것들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약을 먹고 처음 두 달은 하루 종일 졸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뇌를 많이 써야 하는, 사실상 뇌와 손만 쓰는 내 직업에 영향을 미칠까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약은 한 번도 빠짐없이 먹었고, 간신히 정신을 붙들어 매어 일에 집중했다. 심지어 작년보다 더 많은 양의 일을 했다. 광고를 만드는 카피라이터에게 커피는 생명수와도 같은 것인데, 커피를 끊고 3개월이나 일했다. 증상이 더 좋아지고, 하루에 원샷 정도의 카페인을 마실 수 있게 되자, 공황장애 이전처럼 거뜬히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께는 늘 칭찬을 받았다. 단 한주도 빠짐없이 심리상담을 받으며 약을 성실히 먹었으니까. 선생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기분이 좋았다. 일주일간의 몸상태를 이야기하다 보면 자주 내 인생의 크고 작은 조각들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지난날의 조각들은 현재의 나와 반드시 이어져있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고, 솔루션을 찾아주는 쪽이었다. 나의 깊고 어두운 이야기들은 그들과의 대화에서 쌍방으로 적용되지 않았다. 들어주는 쪽은 늘 들어주게 되어있다. 내 고민은 음악이나 책으로 해결되곤 했다. 완치가 되고 나서도 선생님을 정기적으로 만나러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완치 기간으로 6개월을 잡았다. 3월에 치료를 시작해서 귀국 222일이 된 오늘, 치료 6개월 차가 되었다. 약은 아침과 자기 전으로 줄었고, 코로나가 창궐하기 시작했던 1월 이전의 몸상태로 95%는 돌아온 것 같다. 다만 내 몸이 약으로 버티고 있는 것인지, 몸의 기능이 이제 정상화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선생님은 이 상태가 지속되면 천천히 약을 1/4로 줄여보자고 했다. 이제 다 왔다.


IMG_2724.JPG 언니 집 거실 창문 밖 풍경. 제주의 북쪽 바다. 날이 좋으면 남해안 섬들까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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