앱따위는 믿지마라
왜 운전면허를 따지 않냐고 묻는다면, 나에겐 오래된 장롱면허가 있기 때문이다. 왜 연수를 받고 차를 사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내가 '언제까지 제주에 살지 모르는' 시한부 제주인이기 때문이다. 차를 사고 훗날 서울로 가져가면 되지 않느냐 묻는다면, 내가 돌아갈 곳은 서울이 아니라 상하이기 때문이다. 2년 넘게 돌아가지 못하는 집. 내 집이 있는 도시에서는 운전이라는 걸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서 운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차를 사고, 그만큼이나 비싼 차 번호판을 사고, 번호판을 사고도 추첨을 통해 상하이 번호판을 받아야 하며, 혹여 아파트를 샀다해도 주차장은 별도로 사야 한다. 내게 그런 부와 운이 있어 차가 있다고 해도, 내 왕초보 시절을 상하이에서 겪을 수는 없다.
제주에서 연수를 받고, 차를 샀는데 갑자기 비자가 나온다면 난감하다. 운전을 하는 것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먼저다. 그렇게 생각하다 제주살이 2년. 그동안은 언니와 형부가 (그들의 자식처럼) 나를 모든 곳에 데려다주었다. 더 이상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 언니집에서 독립하며, 언니네 차에서도 독립했다. 그렇게 제주의 '버스생활'이 시작되었다.
휴대폰으로 지도앱을 연다. 출발지 도착지를 설정, 버스검색을 한다. 정류장으로 간다. 버스를 탄다. 끝. 대도시의 버스생활은 간단하다. 버스 시간도, 버스 노선도 정확하다. 서울도 상하이도 그랬다. 버스를 타고 이 버스가 요금을 더 받기 위해 돌아가는지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이, 창밖 풍경을 즐기기만 하면 됐다. 그랬는데. 어어?
분명히 '제주시 시청'으로 간다던 버스가 그 전 사거리에서 반대로 좌회전을 하네? 아니 왜요왜요왜요. 다급하게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다시 앱을 열었다. 갈아탈 버스는 5분 후 도착. 내가 뭔가 착각을 했나 보다. 그걸로 타면 되지 생각했다. 하지만 정류장의 안내판은 다른 말을 했다. 그 번호의 버스는 25분 후 도착. 네?
전국구 지도앱보다는 지역의 정류장 '버스정보안내시스템'이 옳았고, 버스는 정확히 25분 후에 도착했다. 문제는 그날의 실수가 '내 착각'이 아니었다는 거다. 신제주에 있는 병원에 갈때도, 구제주의 카페에 갈때도, 회의를 하러 갈때도 마찬가지. 제주시 지리에 어두운 나에게 지도앱은 필수였지만, 무용했다. 적어도 버스에서만큼은.
분명 앱을 확인하고 버스를 탔지만, 중간쯤인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종점 하차'로 내리는 일도, '탑동'(바다)에 가는 버스를 탔는데 산 방향으로 가고 있었던 일도, 차로 15분 거리를 버스로 한 시간 동안 가는 일도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AI, 메타버스, 가상인간이 트렌드인 2022년에 지도앱이 잘못된 정보를 줄리 없다. 그렇다고 내가 매번 버스 번호를 잘못 봤을 리도 없다. 그런데 왜 제주 버스노선 정보와 앱의 정보는 다른가.
고딩 조카에게 물었다. 그거 원래 안맞아요. 심드렁했다. 그럼 뭘 믿고 버스를 타? 그냥 아는 버스 타는 거예요. 모르면 기사님께 물어봐요. 그럼 멀리갈때는? 엄마가 데려다주죠. 아...
제주에 사는 다른 친구한테도 물었다. 버스정보가 앱이랑 다른 거 아니? 아, 안그래도 각자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가 '함덕'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버스가 이상한 곳으로 가는 바람에 저만 늦었던 적이 있어요. 앱은 믿으면 안되고, 기사님께 꼭 물어봐야 돼요. 역시 그랬군.
병원에서 선생님과 대화하다 우연히 버스 얘기가 나왔다. 아 버스, 그거 최근에 엄청 좋아진 거예요. 버스 전용차로도 생기고요! 아...좋아진 거군요. 제가 너무 대도시 버스만 생각하고 있었나 봅니다. 신기한 건 정류장의 사람들이 모두 평화롭다는 것이다. 나만 매번 혼란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버스 실수'를 하고서는 깨달았다. 이제 이곳의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지도앱은 열지 않는다. 동네를 휘 둘러보고 가까운 정류장으로 그냥 간다. '버스정보안내시스템'을 뚫어져라 본다. 모든 번호를 한 번씩 눌러본다. 내 목적지에 가는 버스를 찾는다. 안내시스템의 '도착시간'은 정확하지만 버스의 간격은 길다. 25분 30분씩 기다릴 때도 있다. 그래도 도착시간은 맞는다. 땡큐.
기다리는 동안은 유튜브를 보면서 보낸다. 버스가 도착하면 잠깐, 여기서 그냥 훌쩍 버스를 타면 안된다. 기사님께 목적지 확인사살. 이것이 킬포다. 거기 가나요? 기사님이 고개를 끄덕, 하시면 나도 끄덕, 하고 믿음의 계단을 밟는다. 다음은 그대로다. 맘 편히 앉아 창밖을 보며 제주시 지리를 익히거나, 멍을 때리거나 네이버뿜 같을 걸 보면서 마스크 안으로 혼자 웃는다. 느긋하고 좋다. 바로 내가 즐기던 '버스생활'이다.
가끔은 정류장에서 버스 노선도를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처음 보는 어르신이 답답한 목소리로 묻곤 한다. 아니 대체 어디를 가는데? 아, 시청에요. 으이그 356번, 그거 타. 앱보다 믿을 수 있는 정보다. 그럴 때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제주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반대로 정류장에 동네 어르신이 앉아있다면 그냥 그분께 물어도 된다. 친절하지도 웃음기도 없는, 시크하고 정확한 대답이 돌아온다. 제주의 정은 조금 투박하고 직설적이며, 유용하다.
다음은 좀 멀리 가볼 생각이다. 버스를 타고 애월 성산 한경면도 한 번쯤 가보고 싶다. 제주에 봄이 온 어느 날엔 볕 좋은 창가 자리에 앉아, 일 년 넘게 만나지 못한 서귀포의 고향 친구를 보러 가면 좋겠다. 대도시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제주의 버스생활을 즐겨보기로 한다. 아무래도 내 운전면허는 장롱화석이 되어 백년 후쯤 진품명품에나 나올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