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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Mar 19. 2016

꼭꼭 씹어먹는 시간

Shanghai #3

두 번씩 읽기는 괴로운 책을 오늘도 편다. 손에 들고 온 책이 이것밖에 없다. 30만원어치 주문한 새 책은낡은 살림들과 함께 열흘 후에나 상하이에 도착할 것이다. [전원교향곡]은다시 읽어도 처참하고 [핑크]는 또 읽어도 어딘가 귀엽다. 모든 단편 속 부부들은 오늘도 죄다이혼한다. 2년만에 다시 남편과 함께 사는 내가 이런 이야기를 매일 읽는다. 


밝은 햇볕아래서 내 엄지발톱을 처음 봤다. 야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TV 버라이어티 프로나 틀어놓고 깎을 때빼곤, 내 발톱을 제대로 본적이 없었다. 뾰족한 구두 속에서발가락의 밀도가 높아져 발톱이 다른 발가락의 살을 찌르지 않았다면 발톱을 평생 방치하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한가롭게발톱 따위에 쓸 시간이 내게 있지 않았다. 그때는. 


한 달만 하고 떼내야 한다던 젤 페디큐어를두 달 넘게 하고 있다가 힘들게 뜯어냈더니, 종잇장처럼 얇아진 발톱에는 허옇게 스크래치가 마구 나있다. 뭐든 걷어내야 하는 건 제때 걷어내야 상처가 없는 법이다. 한낱 페디큐어도 그런 마당에 너무 많은 감정의딱지들이 내 온몸에 붙어있다. 혈관 곳곳에 붙어 혈액순환뿐만 아니라 생각의 순환마저도 방해하는. 그것들을 간신히 떼어내면 그 자리에 허연 스크래치가 나거나 피가 몽글몽글 솟아오를 것이다. 아직은 모든 것들을 다 떼어내 버릴 자신이 없다.  어제보다 비가 많이 온다. 오늘은이 창가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내 상처 난 발톱이나 들여다보면서.


언젠가 이십 년 가까이 직장 생활을 하다문득 그만 둔 선배언니에게 회사를 관두고 뭐하고 지내셨냐 물었었다.

매일 아침 깍두기를 천천히 씹어먹었어. 그 말을 들을 때 나는 인생 처음으로 깍두기의 질감에 집중하는 그녀를 떠올리며 웃었다. 지금은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어제 사온 크루아상을 천천히씹어먹었다. 깍두기를 씹어먹던 그녀가 생각나서 다시 웃었다. 그때와는다른 웃음이었다. 


201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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