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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Mar 21. 2016

어느 서커스 단원의 고백

Shanghai #58

한때 9개의 광고주 브랜드를 동시에 진행하며,

9개의 공을 저글링하는 기분으로

기예와 같은 업무를 수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카피라이터이므로

오티를 받으면 광고 전략부터 함께 구상했고,

몇 종류의 컨셉을 도출했으며,

팬톤 컬러의 종류만큼 다양한 아이디어를 뽑아낸 후,

그 컬러풀한 아이디어에 적합한 각각의 카피를 써냈다


그것의 질적문제는 당연한 것이고,

연차가 쌓여갈수록

직급에 걸맞는 양 또한 요구되었다


그러니까 9개의  브랜드를 저글링 한다는 것은

카피라이터가 아닌 카피자판기로 돌변하여

광고주가 동전만 넣으면 무조건적으로

엄청난 양의 아이디어와 카피를 쭉쭉 뽑아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치지 않고서야

긴 세월 그리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광고에 미쳤든가

월급에 미쳤든가

인정에 미쳤든가

생존에 미쳤든가

진짜 미쳤든가.


베겟맡에는 늘 메모지와 펜을 두어

꿈을 꾸다가도 벌떡 일어나 아이디어를 메모했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도 컴컴한 와중에 좋은 대사를 적어두었다

멀더는 늘 말했다

인생에 할당된 에너지를 너무 한쪽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냐고.


그렇다. 한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 중에서

내 열정의 발란스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때 내 인생의 9할은 일.이었다


'광고'라는 서커스단에서 생존한다는 것은 그런것이다

서커스 천막안에서 숙식하며 자나깨나 기예를 수련하고

저글링 공의 개수를 늘리는 것으로 연차를 쌓아가고

때로 불타는 링 속으로 몸을 던져 관객의 환호를 얻어낸다

그리하여 고객님의 박수가 터져나올때 우리는 진심으로 자존감을 확보하고

그곳에서의 생존을 보장받는다


십수년을 그렇게 살았다

박수받는 기예단원을 목표로 매일같이 저글링을 하면서.


그래서 생긴 자신감이 있다

앞으로 살면서 무슨 일을 하든 열심히,

열정의 최대치를 뽑아낼 수 있다는 마음가짐.

그리고 아이디어라면 어떤 분야의 것이든

남들보다는 많이 낼 수 있다는 믿음같은.


그런 자신으로 생애 최초의 '비 광고일'을 시작했다

광고가 아니어도 세상에 아이디어 낼 일들은 많았고,

영역이 파괴된 맨땅에 서 보니

이제서야 카피라이터에서 크리에이터가 된 기분도 들었다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야

그것의 질적문제와 관계없이 자판기식 생산이 가능한 것이므로

요즘 나는 기예단 시절처럼 아이디어를 뽑아낸다


하지만 서커스단을 탈퇴하여 '시스템' 밖으로 나온 나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시스템 안에서는 '좋은 것을 생각해 내는 것'이 나의 파트였지만

시스템 밖에서는 '그것을 실행하는 것'까지 모두 나의 파트다


다른 파트의 팀원이나 외주 업체에게 주던 오더를

이제 나에게 직접 주어야 하며,

말로만 하던 모든 일들을

발로 뛰며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니까, 그토록 힘들었다고 복기하는 시절이지만

이전에는 스스로 9개의 공을 준비한 적도 없고

공연할 호랑이나 코끼리를 잡아온 적도 없으며

관객을 몰아 온 적도 없이

그저 열심히 저글링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그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실상 저글링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요즘은  

분노하던 지난날과는 또 다르게

두렵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다

아무도 나를 채찍질 하지 않고, 칭찬해주지도 않는다

다만 내가 고민하고 뛰고 노력한 만큼의

실질적인 경험치를 얻는다


누구나, 언젠가는,

시스템 밖을 나오기 마련이다


이것은 누구나, 언젠가는,

노인이되고 삶의 고독함을 느끼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인 일이고

결국 겪어야할 인생의 무게다


일단 해보자.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한 끼를 해결해줄 무엇인가는 분명 나올것이다.라고

매일같이 다독여 본다. 이것도 셀프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이 카피 너무 좋은데요! 하던 동료나 광고주의 한마디가 그립다

유대위처럼, 나는 오랫동안 그 말에 홀렸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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