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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Mar 23. 2016

작은 허세의 즐거움

[Spread the bagel]_Shanghai #59

내 중2병의 허세는 대략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

굵고 짧게 살다가 마흔이 되면 멋지게 죽겠다든가.

이번 인생은 뭔가 맘에들지 않으니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다든가.

건강염려증에 시달리는 지금의 나를 보면,

지난날의 허세에 기가 눌릴 지경이다.


이십대의 허세는 열정과 관계된 것이었다.

그 누구도 내 열정에 따라올자 없으며,

열정이 없는자 인정받을 자격이 없다며, 자의 타의로 밤을 샜다.

물론 열정페이 수준의 초봉을 받았다.

그걸 감지덕지 여겼던 것이 더 큰 허세라면 허세.


삼십대의 허세로 치면 반대로 열정이 없어 보여야 하는 것이다.

너무 열심히 하고, 너무 부지런하고, 너무 애쓰면 구리다.

내가 좀 겪어봤는데.의 마인드를 베이스로 깔고

모든 방면에서 시니컬한 톤을 유지한다.

증상으로는 어차피 글렀어. 를 자주 내뱉는다.


지난날의 그것들에 비하면 너무 단조롭지만,

요즘의 허세는 '마스크 쓰지 않기'다.


상하이는 비교적 공기가 좋아

거리에 마스크를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

더군다나 요즘은 봄이 임박하여 거의 매일 날이 좋고,

날이 좋으면 사람들은 3M 필터까지 달린 마스크를 쓴 나를 더더욱 이상하게 쳐다본다.

뭔 상관이람. 대부분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 맑은 어느날이면

갑자기 어떤 낭만적 과감함이 솟구쳐올라

오늘의 기온이든, 공기 퀄리티 수치든 상관없이

마스크를 벗어제끼는 거다.


이제서야 거리의 모든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 되었는데

나는 스스로를 무척 와일드하게, 용감하게 느끼며

거리를 '활보'한다.


그날이 그랬다.

날씨가 너무 좋은 수요일, 수업 후 아무 스케줄이 없는 날.

해외 체류자가 아닌 해외 여행자로 상하이의 낭만을 즐겨보고 싶은 날.


그래서 관광객의 낭만 스팟, 신티엔디(신천지)로 갔다.

언젠가 한번쯤 가보겠다고 생각했던 베이글 샌드위치집을 찾아서.


[Spread the bagel]

관광객이 많아 애초에 영어로 주문을 받는 가게는

검정머리보다 노랑머리 손님이 더 많다.

베이글 종류도 다양하게 고를 수 있고, 주중 점심에는 커피와 수제 쿠키까지 런치세트로 먹을 수 있다.


우리는 시나몬 레이진 베이글 '1세트'를 주문했다.

우리 배 많이 안고프니까 반반 나눠먹자. 그러면서.

생각해보니까 이것도 여자들의 허세네.


그런데 2~30분이 지나도록 음식이 나오지 않는거다.

알고보니 종업원의 착오로 우리는 완전히 잊혀져있었다.

심지어 주문과는 다른 메뉴를 들고오네.


괜찮다고, 이제라도 바꿔 달라고 했는데

과도하게 친절한 서비스의 식당은

우리 여자들의 '안배고픔' 허세를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죄송해서 그런데, 그냥 이거 한세트 더 드릴게요'


서비스 안받으면 어쩔뻔 했어. 반반은 개뿔. 베이글 샌드위치 두세트 흡입 완료. 심지어 쿠키도 소중하게 포장 했다. 이따 커피랑 먹자 흐흐.


내친김에 신천지 근처에 스타벅스 리저브 매장이 있다고 해서 물어물어 찾아왔다.

허세로 시작된 '노 마스크' 산책에 어울리게 스벅도 프리미엄 매장으로.


인테리어와 머그잔 등의 소품은 확실히 프리미엄 하다.

하지만 이런 매장에 와서 스페셜티 커피를 주문하지 않고,

몸에 아무렇게나 배인대로 '그냥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이럴거면 집앞 스벅이랑 다를게 없는데.


그래도 돌아오는길에 여전한 '노마스크'로 공원길도 산책했고, 집 앞 럭셔리 마트에서 소소한 쇼핑도 하면서

오늘의 허세를 즐겼다.


십대처럼 삶에 과감하지도 않고,

이십대처럼 뜨겁게 밤도 못새며,

삼십대처럼 뭔가 다 알것같지도 않고,


그저 '천식 억제'같은 것에 노력하며 사는 내 모습은

어딘가 작아져버린것 같기도 하지만

봄날 햇볕에 조금 과감해질 수 있는 것 만으로,

선물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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