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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Mar 25. 2016

일요일의 무장해제

신천지 [KABB]_Shanghai #61

우리는 서로 얼굴을 몰랐다.

글을 통해서 만났다.

그러나 알자마자 바로 만나야할 사람임을 나는 직감했다.


아무리 지금의 내가 조금은 달라져 있다해도

내 뼛속 깊이 인이 박힌 일들을, 세계를, 그게 한때 삶의 전부였음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

업계사람이다.


그동안 광고업계 사람들에 질릴만큼 질렸어도

업계 사람이 제일 재밌고 편하다는건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똑똑하고 강하고 독립적이며,

논리에도 강하지만

낭만도 아는 사람들.


하지만 말이 많고, 지는걸 못참으며,

느리고 답답하고 눈치없는건 더 못참는 사람들.

성격 지랄맞은것 보다 일 못하는걸 더 싫어하는 사람들.

함께 진흙밭을 뒹구니, 내가 좀 더러워도 괜찮은 사람들.

진흙밭이 더럽다고 욕하면, 함께 욕해주는 사람들.

입은 걸어도 마음 한켠에는 '인류애' 같은 단어도 품고사는 사람들.

업계의 내친구들이 그랬다.


상하이에 와서 모든게 좋았지만,

그 친구들이 없다는 사실은 때마다 철마다 아쉬웠다.


일요일 우아한 브런치 카페에 앉아

고급 스페셜티 커피를 마시면서도

악취나는 진흙밭을 욕하고, 희망없는 세상을 욕하고.

그렇게 우리의 일상성은 너무 추하지 않게

그런대로 유지되었었는데.


지금은 나름 잔디밭에 앉아있으니

딱히 욕이 나오지도 않고

신경을 예민하게 바짝 세워야 할 일도 없어서

가끔은 이대로 둔해져버리는건가.

그런 기분이 들때가 있다.


그래서 업계 사람을 만난다는건,

마음놓고 뾰족해질 수 있고

마음놓고 더러워질 수 있으며

마음놓고 나를 풀어놓을 수 있으며

실로 오랜만에

공감을 나누고 서로 이해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설렜다. 만나지도 않았는데 할 얘기가 이미 태산이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어떻게 생긴 분인지

미처 확인하지도 않고 달려나갔다.


그런데 그녀와 만나는 곳 1미터 전.

내가 예상했던 그 사람은 없고

웬 장신의 모델 하나가 서 있다.

심지어 너무 이쁘네.

(아니야, 저런 사람이 진흙밭에서 구르고 있을리 없어)


하지만 만나기로한 장소에 서있는건 그녀 뿐.

너무 좀 심각하게 이뻐서

조금 부담스러워하던 내게

그녀는 화사한 미소로 나를 알아보았다.


일요일의 햇볕만큼이나 환하게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신천지 [KABB]의 오믈렛과 에그베네딕트

사실 저 음식들의 맛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너무 배가 고팠고, 너무 이야기가 고파서 에그 베네딕트를 먹었는지 말을 먹었는지 기억이 없다

이제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팔꿈치가 긴 사람으로 등극했다.


우리는 일요일 신천지의 낭만을 즐기는둥 마는둥

마치 오랜시간 못 만났던 친구와 재회한듯

서로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녀는 욕 없이도 진흙밭의 고단함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우아함을 가진 사람이었다 .


나는 솔직히 그녀가 너무 반가워서

초면에 손을 덥석 잡을 뻔 했다.


그녀는 이제 5년차, 나는 얼추 15년차

같은 회사에서 만났다면 눈인사나 나누는 사이로,

결국 비슷한 직급끼리나 어울렸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나보다 많이 어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드물게 '애늙은이' 같은 어린 친구들을 좋아한다.

어려서 오는 패기든 자신감이든 객기든, 나는 그런것들이 좀 버겁다.

조용히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한발씩 나아가는애늙은이 형에게, 나는 늘 신경이 쓰이고 시선이 간다.


사실 오늘 만날 그녀가 '어떤 유형의 업계사람'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업계친구를 만날 반가움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데 만나서 4시간을 줄창 얘기하다가.

업계 사람이 아닌, 그냥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어떤 면에서 그녀는 애늙은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용감했다.

무엇보다도 경주마들이 경쟁과 성과만을 위해 달려가는

업계의 트랙 밖, 너머의 세상도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한껏 쏟아내고 헤어지는데도,

못다한 말들이 몇 웅큼씩 가슴에 남아있었다.


또 만나면 되지.

날 좋은날 아무맛도 못 느껴도 되는 브런치를 앞에두고

또 이야기하면 되지.


상하이의 봄도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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