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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필소녀 Mar 28. 2016

장인형 인간의 위대함

Shanghai #64

알고는 있었지만, 퇴사를 하고 크게 깨달은 게 있다.

나는 생각보다 '훨씬' 등신이라는 것.

책상머리만 떠나면 이상하게 몸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응팔에서도 '어남택' 파였는데, 바둑판만 떠나면 등신이 되는 택이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나는 정작 '바둑 천재도 아닌 택이'에 가깝지만.


어제 이웃집 N이 깜짝 놀랐던 사실은, 내가 한 달 전에서야 처음 '제대로' 달걀을 삶아봤다는 것이었다.

샐러드 만들기, 옥수수 삶기 등도 몇 달 전에 처음 해봤다.


운동화를 빨아본 적도 (운동화 끈을 매본 적도) 없고,

중딩 때 오래 달리기를 완주한 적도 없고,

뜀틀도 한 번도 못 넘어봤으며,

페트병 뚜껑도 내 손으로 잘 안 따지고,

뭐든 손에서 미끄러져나가고, 놓치고, 잃어버리고,

(핸드폰 분실 회수가 15회에 육박한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부터 손으로,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을

잘 해본 적이 없다. 이쯤 되면 정상인의 80% 정도로 태어났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나는 어떤 부류의 사람에게

엄청난 경외심과 존경심을 갖고 있다.

손재주가 많은 사람.

토요일에 만난 S같은 사람.


S는 도자기를 만든다.

그런데 컵케이크도 만든다. 빵도 만들고 잼도 만들고,

인간이 직접 만들 거라고 생각 안 했던 수제 그래놀라도 만든다. 심지어 제대로 배운 적도 없다. 책으로 독학했다.

손으로 하는 모든 것에 능숙한 '장인형 인간'이다.


그녀를 바로 이 타이밍에 만난 것은,

나에게 귀인 출몰과도 같았다.


패브릭 시장에 다녀온 후 팬톤 컬러를 붙잡고 고민했던 우리에게, 그녀는 실로 위대한 깨달음을 주었으니까.

실제 두잉은 팬톤 북의 넘버나 책상머리 수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진리를.


S의 주옥같은 조언은 토요일 오후햇살만큼이나 눈부셨다.

나 같은 책상머리형 인간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꿀팀들이 오후 내내 쏟아져서 머리가 살짝 몽롱한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S의 귀여운 딸을 만났고, 아홉 살짜리가 정확한 성조로 발음하는 중국어를 넋을 잃고 바라보기도 했다.

너 중국어 진짜 잘한다!! 하고, 아홉 살짜리 친구 같은 말투로 감탄했는데, 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하는 어린이의 예의바름에 다시 한번 놀랐다.

요즘은 그런 어린이가 귀한 세상이니까.

신티엔디(신천지)의 무자비한 관광객 인파를 뚫고 S의 단골 카페로 향했다. 커피맛만큼이나 잔이 예쁘다.

여자들은 가끔 이런 이유만으로도 단골이 된다.

S는 직접 만든 캐러멜 잼과 홈메이드 그래놀라를 내게 안겨주었다. 직접 만들어보기는커녕 제대로 먹어본 적도 없는 음식이다.


저녁에 멀더에게 맛있는 식빵을 사 오라고 했다.

수제 캐러멜 잼은 질리게 달지 않고, 담담하고 산뜻하게 달았다. 예의 바른 어린이는 아마도 이런 잼을 먹고 자라서 성격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홈메이드 그래놀라는 지금 내 옆에서 멀더가 쩝쩝거리면서 먹고 있다. 엄청 맛있다는 소리다.


S를 만나고 돌아오던 토요일에, 재능이 엄청 부럽다고 했더니 그녀가 자학개그를 날린다.

언니는 화이트칼라고 저는 블루칼라잖아요.


나도 자조적인 답장을 보냈다.

'어차피 글로벌은 블루칼라야'


외국에선 아무짝에 쓸데없이 광고회사 책상머리에서

카피나 쓰던 한국어 실력은 개나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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