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오만가지 불길한 기운이 내 머릿속을 휘저었다. 사고가 마비된 나는 딸아이가 아파트 입구 어린이집 앞에 있다는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이 나를 진정시키고 밖으로 나가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 주 주말에 외가에 갈 거라고 했더니, 딸아이는 친구들과 영화 보고, 같은 아파트 사는 친구 집에서 놀기로 했단다. 그럼 좀 늦게 출발할 테니, 3시까지는 꼭 집에 오라고 당부했다.
영화를 보고, 간단히 점심을 먹은 후, 영화관을 나왔을 때, 날은 너무 더웠다. 아이들은 계획을 바꿔서 영화관 가까이 사는 친구네 집에서 놀았다. 2시가 조금 지나, 딸아이는 같은 아파트 사는 친구에게 집에 가자 했더니, ‘너 먼저 가. 나는 좀 더 놀다가 갈게’ 했단다. 어쩔 수 없이 어른 걸음으로도 족히 40여 분을 걸어야 하는 거리를, 초등학교 5학년 아이가 처음으로 걸어서 집에 돌아오기에 도전했다.
그전에도 딸아이는 친구들과 영화관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도 가는 버스는 쉽게 탔지만, 오는 버스 타는 곳을 몰라 집까지 걸어왔었다. 더운 날씨에 혼자 걸어올 생각을 하니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시 영화관 앞을 지나는데, 서 있는 택시를 보고는, ‘아! 택시를 타면 되겠구나’했다.
딸아이는 아파트 앞에 도착해서, 택시비는 삼천 원, 자신의 주머니에 있는 돈은 이천 원이라는 사실에 부딪혔다. 딸아이는 당황했다.
“아저씨,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저기 CD기에서 돈 찾아 드릴게요.”
택시 기사는 한숨을 푹 쉬고는 됐으니 그냥 가라며 이천 원만 받고 가셨다.
몇 달 전 은행에 가서, 딸 이름으로 현금 입출금 카드를 만들어 주었다. 간혹 친척분들이 주신 용돈을 가지고 있지 말고 아파트 앞 CD기에 입금하고, 필요할 때 빼 쓰라고 가르쳐 주었다. 한두 주쯤은 신기한 듯 넣고 빼고 하더니, 이내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러고는 자기 책상 서랍에 돈을 넣어두는 눈치였다.
택시 기사가 떠났는데도 딸아이는 CD기에 들어가 현금 인출을 시도했다. 처음엔 방법이 기억나지 않았는데, 찬찬히 안내에 따라 기계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기계음을 듣게 되었다.
“잔액이 부족합니다.”
택시비가 얼마인지도 모르고 택시를 탔고, 통장에 잔액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기사님께 기다려 달라 부탁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은 아이는 다리가 풀려버렸다. 그제야 엄마에게 전화해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울음이 터져버렸다.
“왜 친구 집에서 엄마한테 전화하지 않았어? 그럼 데리러 갔을 거 아냐? “
속상한 마음에 다그치듯 물으니, ‘모르겠어. 모르겠어’라는 말만 반복하며 울었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별일도 아니었는데…….
내 나이 스물여섯 살이던 해에, 한 달간 혼자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갔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휴대폰으로 해외 로밍을 받아 쉽게 통화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고, 공중전화로 거는 국제전화 요금도 꽤 비쌌다. 가난한 배낭 여행객에겐 더욱 그랬다. 혼자 규칙을 정한 것이 나라를 옮겨갈 때만 엄마에게 전화를 하자였다. 그러려니 삼사일에 한 번이나 전화하는 꼴이 되었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엄마 친구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여행 다니는 동안, 네 엄마 죽을 뻔했어.”
연락이 오지 않으면 엄마는 전화 오기를 기다리며 제대로 주무시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게 몇 날이 지나 쏟아지는 코피가 멈추지 않았단다. 이러다 죽겠다 싶어 친구분은 엄마를 병원으로 데려가 링거를 맞게 해 주셨다고 하셨다.
“왜 그랬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데……. 그런데 가서 문제 생기면 뉴스에 나겠지.”
나는 웃어넘겼다. 원래 우리 엄마는 걱정이 팔자인 사람이니까.
나이가 들어 엄마가 되고, 하루만큼씩 엄마 마음에 다가가며, 엄마를 이해할수록, 엄마는 참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시집가 모진 시집살이하고, 당신 자식을 길러냈더니, 시대가 달라졌다. 며느리가 집에 다니러 오면 밥을 차려주고, 자식의 자식도 키워줘야 하는, 당신에게만 불합리한 세상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엄마가 타고난 시절 탓이라고 생각했다.
고된 세월이 쌓이고 쌓여 걱정은 엄마에게 팔자가 되었다. 그러데 엄마의 제일 큰 걱정이 딸이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