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달씨 Aug 30. 2023

전구 여섯 개만큼의 밝기로 나를 돌본다


거실이 너무 어두워서 전구를 갈았다. 이사 오고 나서 처음이니까, 4년 만일까.

우리 거실에는 6개짜리 전구가 달린 나뭇가지 모양의 전등이 총 2개 달려있다. 전구만 총 12개인 셈이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땐 심플하고 모던한 전구 하나짜리 펜던트 등을 두 개 달았었다. 하지만 서까래와 대들보가 있는 우리 집 천장 구조, 그리고 해가 많이 들어오지 않는 처마 구조로 인해 거실이 너무 어두웠다. 그래서 거금을 들여 6구짜리 고급 전등 두 세트로 교체하고는 꽤 오래 지냈다.

시간이 갈수록 전구는 하나 둘 꺼져갔지만 전기도 아낄 겸 대충 내버려 두었더니 이제는 양쪽 합쳐서 절반의 전구만 켜지는 상황이 되었다. 거실은 다시 어두워졌다.


8월 동안 여행을 많이도 다녀왔다. 다닐 때는 마냥 신났는데, 모든 이벤트가 끝나고 나니 무기력이 찾아왔다. 지겹도록 자꾸 내리는 비에, 컴컴한 거실에 앉아 있으려니 자꾸 바닥으로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컴컴한 거실이 싫어서 밖으로 나갔다. 딱히 갈 곳은 없어서 이웃과 커피 한 잔 마시고 들어오면 집은 여전히 어둠 속.


남편에게 전화해 전구를 사다 달라고 했다. 전기를 아끼는 것보다 밝음을 되찾는 것이 더 중요해 보였다. 남편이 퇴근해서 돌아와 먼지 낀 전구들을 빼고 새 전구로 갈아 끼웠다. 거실은 다시 제법 환해졌다. 이렇게 환했었나.


그리고는 낮에 자고 또 잤다. 낮잠을 자는 일은 내게 최고의 사치라는 기분이 든다. 설거지는 최대한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뤄두고 침대에 누웠다, 소파에 누웠다 한다. 이런 사치,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작업도 없는데 좀 쉬면 어때서.


무기력이 왔지만 괜찮아지려고 애쓰지 않는다. 아주 최소한의 것을 하고 나머지는 쉬도록 내버려 둔다. 낮잠이라는 사치를 부리며 전구 여섯 개만큼의 밝기로 나를 돌본다. 이런 기분 꽤 괜찮다. 되도록이면 나를 돌보는 쪽으로 선택하기. 내게는 무척 소중한 변화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는 건 그냥 사는 거예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