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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씨 Sep 04. 2023

이상하고 귀찮고 소중하다

나 다운게 뭘까


이쯤 나이가 되면 립스틱은 바르고 다녀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나는 면세점에서 누구 선물로 립스틱을 골라본 적은 있어도 내 얼굴에 바르려고 산 적은 없다. 사실 화장을 전혀 하질 않는다. 그나마 여름 한정 바르던 선크림도 우산 겸 양산을 매일 가지고 다니고서는 전혀 바르지 않게 되었다.

특별한 철학 때문이라기보다, 나는 얼굴에 뭐가 묻어있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한다. 액세서리를 하지 않게 된 것, 여름이나 꼭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는 것, 하이힐은 커녕 굽 낮은 구두조차 신지 않게 된 것 모두 비슷한 이유다.

그렇다고 외모를 꾸미지 않느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머리를 꾸준히 갈색으로 염색하고, 떡진 머리로는 절대 밖에 나가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남모르게 몸매나 보여지는 모습에도 무척 신경을 많이 쓴다. 옷을 좋아해서 돈도 참 많이 쏟아부었다.

나는 그냥 불편한 것을 참고 싶지 않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세상이 온통 불편한 것 투성이인데, 최소한 내가 내 몸에게는 그런 짓을 하고 싶지 않다. 대단히 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를 학대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얼마 전 아는 언니가 내게 립스틱을 사주고 싶어 했는데 별의별 이유를 다 대고 극구 거절하면서, 마지막엔 ”나는 내 입술 색이 좋아요.“라고 했지만 나는 딱히 내 입술색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다만 나를 그런 것으로 가리고 싶지 않을 뿐이다.


나의 외모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나는 내가 쓰고 만든 책의 ‘외모’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다. 글솜씨도 보통인데 그림 솜씨는 더 보통 수준인 내가 책의 얼굴이 되는 표지까지 디자인하다 보니 내 책은 내가 봐도 그렇게 완성도 있다는 느낌이 아니다.

요즘 유행하는 독립출판물들을 보면 화려한 그림이나 디자인 솜씨를 뽐내는 책들도 많고, 그게 아니면 멋들어진 사진으로 표지를 장식하거나, 그도 아니면 단색 표지에 단순한 명조체 제목이 전부인 경우도 많다. 마지막의 경우는 최근 저자가 직접 인디자인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책을 만드는 추세가 늘어나면서 디자인이 점차 단순해진 것으로 해석된다.

제목의 느낌이 좋으면, 비슷비슷하게 단순한 디자인의 책들도 독자들의 손에 들어간다. (모 서점에서는 SNS를 통해 매일 출고되는 책들을 사진 찍어 올리는데 정말로 비슷비슷한 명조체 제목의 책들이 많이 팔린다.) 그런 현상을 보면서 ‘내 책도 단색 표지에 그냥 단순한 명조체 제목의 <오늘의 밥값>, <어쩌다 마당 일기>였으면 지금보다 더 잘 팔렸을까. 어쭙잖고 아마추어 같은 내 그림과 손글씨로 장식된 표지가 아니었다면...’ 하고 고민해 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들킬까 봐 어디에도 말한 적은 없지만 책 판매 부수가 올라가지 않는 걸 보며 내심 떠올리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개정판을 만든대도, 혹은 다른 책을 만든대도 나는 내가 쓴 손글씨와 직접 그린 손그림을 이용할 것이다. 결국 그렇게 되고 말 팔자다. 그게 나여서 피해 갈 도리가 없다. 아무리 유행이라고 해도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을 수없다. 원하지도 않는 립스틱을 억지로 바를 수 없는 것처럼. 남들이 부럽다고 남이 될 수는 없는 게다. 그게 참 야속하면서도 한편으론 안심이 된다. 곁눈질할 필요 없이 나의 길을갈 수밖에 없다는 것. 어차피 내게 주어진 길은 그것뿐이라는 것.


다시 한번 나 다운게 뭘까 생각해 본다. 맨얼굴이지만 귀엽고 예쁜 옷을 입고 싶고, 하이힐은 싫지만 운동화는 색깔별로 브랜드 별로 갖고 싶고, 요리는 못하지만 예쁜 그릇을 모으고, 술을 못 마시지만 귀여운 와인을 보면 참기 어려운 나. 남이 만든, 제책 상태가 훌륭한 책을 보며 감탄하고 부러워 하지만, 어설프게 만들어진 내 책도 소중하고 좋아서 우쭈쭈 하는 나. 그 여러 나 사이에 내가 있다. 이상하고 귀찮고 소중하다.



화장을 하지 않는 대신 로션은 비싼 것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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