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달씨 Sep 11. 2023

언젠가의 요리 재료


정세랑의 단편소설*을 읽다가, 내 인생의 어느 장면을 소설로 써야 한다면 어떤 부분이어야 할까 생각해 보았다. “내 인생을 소설로 쓰면 아주 그냥 장편 대하소설이야!” 할 만큼 대단히 굴곡진 인생을 살아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끔 떠오르는 장면들은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기는 커녕 오히려 선명해지게 마련. 대체로 아픈 생채기에 가까운 그런 기억들이 아직 쓰이지 않은 내 소설의 재료가 될 수 있다니 감사해야 할지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다.


친구를 사귀는 데에 적극적이지 못하지만 한 번 사귄 친구에겐 집착적이거나 소홀하곤 해서 친구를 매번 잃어온 학창 시절을 이야기해야 할까. 그런 친구의 배신을 고발하기 위해 찾아간 나이 든 남자 담임선생님이, 나를 무릎에 앉히고 가슴을 만지고 생리를 하느냐고 물었던 이야기를 써야 할까. (나는 그때 6학년 씩이나 먹고선 어린애처럼 굴어서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검은 자동차를 타고 중학교 정문에 나타난 빚쟁이들을 피해 선생님 차에 올라 추격전을 벌였던 이야기는 과연 쓰일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해서 매일 신발장에 편지를 넣어두던 그 선생님이 졸업 선물로 내게 랜드로바 구두를 사주었을 때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던 이해할 수 없는 순간들은 언젠가 기록될 수 있을까.


9박 10일간 남도를 여행했던 이십 대의 끄트머리, 친하지도 않은 선배의 고향집에서 신세를 지고 선배의 아버지 오토바이 뒤에 타고 섬마을을 돌았던 기억은 썩 좋은 재료라 언젠가 좋은 타이밍에 쓰고 싶다. 그때 섬을 떠나기 전 선배 아버지가 주셨던 용돈을 주머니에 찔러넣고 혼자 울었던 기억도.

순천의 친구 부모님이 하시던 찜질방에 하루만 재워달라고 찾아갔던 날, 조사마다 욕이 붙었던 친구 어머니의 찐한 전라도 사투리는 내 삶에서 가끔 일어나는 웃긴 일 중에서도 손꼽히게 웃긴 장면인데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삶의 어떤 장면들이 미래의 나에게 어떤 재료가 된다. 무언가 씁쓸하면서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런 재료들 -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짜기도 하고 싱겁기도 한 재료들을 제법 가지고 있다. 아직 제대로 요리할 줄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식탁 위에 올릴만한 그럴듯한 음식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의 그런 날을 떠올리니 내 삶도 그다지 나쁘지 않게 흘러왔다는 생각. 지나온 일들에, 그럼에도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싶은 오늘의 기분을 적어본다. 지금 이 순간도 언젠가의 요리 재료가 될 거라고 믿으며.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

매거진의 이전글 이상하고 귀찮고 소중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