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밥값 37 /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름답다고
햇살 좋은 토요일 오후다. 아이는 태권도 보충수업을 받으러 체육관엘 갔고, 나는 아직도 잠옷 차림으로 뒹굴거린다. 거실 화분들 옆에 누워 같이 햇빛을 쬐고 요조 언니가 추천해준 쇼난 비치 FM을 틀어놓고 요조 언니의 책을 읽는다(멋있으면 다 언니).
요조 언니의 본명은 신수진인데 나와 성을 뺀 이름이 같고 나이도 엇비슷하다. 그래서인지 뮤지션임에도 글을 쓰고 책을 내고 급기야 책방까지 열어 운영하고 있는 그녀가 무척 자랑스럽다. 일면식도 없는데 말이지.
책을 읽다 말고 아침에 내렸던 식은 커피에 뜨거운 물을 부어 들고 왔다. 거실 창 밑 쪼르르 앉아있는(서있는?) 화분 곁에 쪼그려 앉아 미지근한 커피를 홀짝인다. 까끌한 발 뒤꿈치의 각질을 습관적으로 뜯으며.
어릴 때 엄마의 발 뒤꿈치를 보며 늘 궁금했다. 왜 저렇게 딱딱하고 거칠게 갈라질까. 엄마는 늘 보드라운 존재인데 말이지. 이상하게 발만은 딱딱했다. 지금의 내 발이 그때의 엄마 발과 똑 닮았다. 발만이 아니다. 어째서인지 몸의 윤곽도 전체적으로 비슷해지는 중. 그제야 엄마가 나를 보며 했던 말들이 이해가 간다. "엄마도 아가씨 때는 너처럼 빵만 먹고 만날 체하고 그랬어. 사십오 키로 정도밖에 안 나갔었는데..."
어제 <세상은 아름답다고>(오사다 히로시 지음)라는 책을 읽다가 인스타그램에 짧게 글을 썼다. 제목과 달리 쓸쓸해지는 책이라고. 제목 앞에 '그럼에도'가 붙어야 할 것 같다고.
그리고 오늘 읽은 책 <오늘도, 무사>(요조 지음)의 한 부분은 이렇다.
"우린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삶을 살아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게 위해 모험을 떠나고 투쟁을 해도 우린 끝끝내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다다르기 위한 여정을 통해 삶의 이유를 깨닫는다.(중략) 실패 없는 세계는 없고 실수 없는 세계는 더더욱 없다."
그러고 보면 며칠 전까지 읽었던 <보통의 것이 좋아>(반지수 지음)에서는 이런 대목을 저장했다.
"세상이 부조리하게 흘러가는 것 같지만, 실은 우리 주변의 70퍼센트 이상은 아주 정상적인 사람들이다. 우리 주변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상식적인 경우가 많다. 가장 대중적인 그들을 믿어라"
잠시만 둘러보아도 세상은 의외로 믿음직스럽다.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사람들 덕에 도시의 많은 부분이 오늘도 무탈하다는 것을, 미디어는 무탈한 자들의 소식은 전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의 사람들의 삶은 더욱 고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싶어 진다.
굳이 더 믿어야 하는 쪽이 있다면 내가 본 평화와 보통의 순간들이라 생각하면서 걷고 또 걷는 일은 멈출 수가 없다. 보통 사람들의 모습에 이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
나는 요즘 지극히 보통의 삶을 살고 있다. 재난이나 전쟁 등으로 일상을 잃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고 오사다 히로시는 책에서 말했다. 우울이라는 개인적 재난을 지나온 나는 그것을 매일매일 실감한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사소한 스트레스들을 넘길 수 있게 되고(사소하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고), 작은 실수와 소소한 착실함을 반복하는 평범한 나와 평범한 일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 일이 들어오면 하고 배가 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쉬고 몸이 무거우면 운동을 하고 웃고 싶으면 티브이를 봤다. 책과 글쓰기는 되도록 멀리 했다. 그런 보통의 삶.
연말 특수로 일에 너무 치어서 지친 어느 날, '이게 사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조용히 혼자 말했다. "이게 사는 거지."
아이가 태권도장에서 돌아왔다. 떡만둣국을 끓여 늦은 점심을 먹여야지. 오늘은 게임을 조금 더 시켜줘야지. 느긋한 오후는 책갈피처럼 잠시 접어두고 서툴고 분주한 엄마로 돌아가는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아름답다고 적어놓기 위해 오랜만에 펼쳐보는 오늘의 밥값.
2022/11/26
*제목은 위에 소개한 <오늘도, 무사>의 대목에서 따왔다. 요조 언니의 팬 성우씨가 책에 써두었다는 메모 속 글귀이다.
**조금 전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고 해시태그로 '#오늘도무사'를 적어 넣었는데, 조금 있다 보니 태그가 '#오늘도무사히마치자'로 바뀌어있었다. 자동입력기능으로 그렇게 된 모양이라 원래대로 돌려놓고는 픽 웃었다. 그래, 오늘도 무사히 마치자. 하루 하루 무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