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수담소사

표류가 아닌 항해하는 삶

by 수담
Aivazovsky,_Ivan_-_The_Ninth_Wave.jpg 이반 아이바좁스키 [아홉 번째 파도], 1850년, 러시아 미술관


출항과 동시에 사나운 폭풍에 밀려다니다가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같은 자리를 빙빙 표류했다고 해서, 그 선원을 긴 항해를 마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긴 항해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오랜 시간을 수면 위에 떠 있었을 뿐이다. -세네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우리는 참 많은 시간을 '표류'하며 보냅니다. 직장에서 매일 출근도장을 찍고, 월급을 받고, 퇴근을 하지만 정작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를 때가 있어요. 관계도 그렇습니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지만, 진짜 의미 있는 만남이 무엇인지 모른 채 시간만 흘러가기도 하죠.


제 지난 시간을 돌아봐도 그런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20대에는 남들 다 하는 대로 스펙을 쌓았고, 30대에는 주변의 기대에 맞춰 살았어요. 바쁘게 움직였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저 바람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배처럼, 파도가 치면 그쪽으로 흘러갔죠. 돌이켜보면 그 시간들이 무의미했던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방향을 정하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재미있는 건 바쁜 게 곧 의미 있는 삶이라고 착각하기 쉽다는 점입니다. SNS 타임라인을 보면 모두가 뭔가를 하고 있어요. 여행도 가고, 자격증도 따고, 부업도 하고. 그런 모습을 보면 '나도 뭔가 해야 하는데'라는 조급함이 몰려옵니다. 하지만 그렇게 바삐 움직이는 것이 진짜 항해인지, 아니면 그냥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표류인지는 다른 문제예요.


진짜 항해와 표류의 차이는 뭘까요? 방향입니다. 항해하는 사람은 목적지를 알고 있어요. 폭풍이 불어도, 파도가 쳐도, 배가 흔들려도 나침반을 보며 방향을 잡습니다. 때로는 우회하기도 하고 속도를 늦추기도 하지만, 결국 가고자 하는 곳을 향합니다. 반면 표류하는 사람은 바람이 부는 대로, 물살이 가는 대로 떠밀려갑니다. 움직이긴 하지만 자신의 의지가 아니죠.


세네카가 이 비유를 든 이유가 있을 겁니다. 시간의 길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거예요. 20년을 바다에 떠 있었어도 표류만 했다면 그건 긴 항해가 아니고, 1년을 항해했어도 목적지에 도달했다면 그게 진짜 항해라는 것이죠.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이가 얼마든, 살아온 시간이 얼마든 중요한 건 방향을 가지고 살았느냐는 거예요.


그렇다고 거창한 목표를 세워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계일주를 하겠다든지, 대기업 임원이 되겠다든지 하는 큰 꿈만이 방향은 아니거든요. 좀 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도 방향이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는 것도 방향입니다. 중요한 건 그 방향이 남이 정해준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죠.


다행인 건 항해는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표류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표류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지금 이 순간, 방향을 정하면 됩니다. 나침반을 꺼내 들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이 어딘지 생각해 보는 거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말처럼, 깨달은 순간이 바로 항해의 시작점입니다.


세네카의 말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긴 시간을 살았다고 해서 의미 있는 삶을 산 건 아니라는 것, 중요한 건 방향을 가지고 내 의지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진실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배를 타고 바다 위에 있습니다. 표류할 것인가, 항해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 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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