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길을 잃는 사람들

by 수담


집 근처 '강동 숲 속 도서관'.

문득 들른 도서관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50대로 보이는 한 남자분이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책 등을 하나하나 쓰다듬고 계시더라고요. 책을 고르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손끝으로 책들을 어루만지기만 하는 모습이 묘하게 인상적이었어요.


저도 모르게 그분의 뒤를 따라 걷게 되었습니다. 문학 코너에서 사회과학 코너로, 다시 역사 코너로. 그분은 마치 오래된 친구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하듯 책들 사이를 헤매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 이분은 지금 길을 잃은 게 아니라 길을 찾고 계신 거구나.


요즘 사람들은 도서관에 가도 목적이 분명합니다. 읽을 책의 제목을 검색해서 청구기호를 확인하고, 해당 서가로 직행해서 책을 빌려간 후 바로 나가죠.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에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책들, 지나가다 눈에 띄는 제목들, 손끝에 닿는 책등의 감촉 같은 것들을 놓치게 됩니다.


저 역시 그랬거든요. 강연 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에 가면 필요한 책만 찾아서 대출하고 나왔어요. 시간이 아까워서,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하지만 그러다 보니 도서관이 단순한 책 보관소 이상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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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에는 달랐습니다. 그때는 도서관에 가면 몇 시간씩 서가 사이를 배회하곤 했어요. 아무 목적 없이 그냥 걸으면서 재미있어 보이는 책을 꺼내고, 몇 페이지 읽어보다가 다시 꽂고, 또 다른 책을 펼쳐보곤 했죠. 그 시간이 참 행복했어요. 마치 보물 찾기를 하는 것 같았거든요.


한 번은 우연히 손에 잡힌 책 한 권이 제 인생을 바꿨던 적도 있습니다. 청구기호를 잘못 읽어서 엉뚱한 서가에 갔다가 발견한 책이었어요. 만약 정확하게 찾던 책만 빌리고 나왔다면, 그 책은 평생 만나지 못했을 거예요. 인생에서 중요한 만남들이 그렇듯, 우연처럼 보이지만 필연인 순간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날 도서관에서 본 그 남자분도 아마 무언가를 찾고 계셨을 거예요. 구체적인 책 제목이 아니라, 어쩌면 잃어버린 시간이나 잊힌 감정 같은 것들을 말이에요. 책등을 쓰다듬는 그 손길에는 그리움이 담겨 있었거든요.


도서관의 가장 큰 매력은 길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고, 도착해야 할 시간도 없고, 그저 서가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마음이 가는 대로 책을 만지고 펼쳐볼 수 있는 자유. 그 속에서 우리는 의외의 발견을 하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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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집에서 클릭 몇 번이면 원하는 책을 살 수 있고, 전자책으로도 즉시 읽을 수 있습니다. 편리하죠. 하지만 도서관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오래된 책에서 풍기는 종이 냄새, 누군가 연필로 밑줄 쳐놓은 문장들, 책갈피로 끼워진 낡은 영수증 같은 것들. 그 모든 것이 누군가의 흔적이고 시간의 기록이거든요.


그날 이후로 저도 가끔 목적 없이 도서관에 갑니다. 강연 자료를 찾지도 않고, 읽을 책을 정하지도 않은 채 그냥 서가 사이를 걸어요. 그러다 손끝에 닿는 책을 펼쳐보기도 하고, 아무 페이지나 읽어보기도 하죠. 그 시간 동안만큼은 목적과 효율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그런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을 잃어도 괜찮은 시간, 방향을 몰라도 되는 공간. 도서관은 그런 허락을 주는 몇 안 되는 곳이에요.


오늘도 누군가는 도서관 서가 사이에서 길을 잃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길 잃음 속에서 진짜 찾고 싶었던 것을 발견하게 되겠죠. 마치 제가 그랬던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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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