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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Aug 05. 2020

먹어서 죽는다지만 고기는 먹이고 싶어.

고기를 좋아하는 딸에게.

딸이 전화를 했다.


전화기 너머 딸의 목소리가 밝다. 그 목소리에 가슴이 설렌다.


"엄마, 100g이 어느 정도야?"

"100g? 글쎄...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그건 사는 물건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 지금 어디야? 뭘 사려고 하는데?"

"응, 마트에 왔는데 닭갈비가 100g에 1000원이래."

"그래, 그럼 600g 정도 사 볼래? 600g이 한 근이니까 일 인분 정도 되지 않을까? 여름 음식은 금방 상하니까 너무 많이 사지는 마. 그리고 닭갈비에 넣을 새송이버섯을 좀 사. 양파 넣는 것도 잊지 말고. 그렇게 해서라도 채소는 먹어줘야겠지? 과일도 낱개로 포장된 것이 있으면 사고"

"어... 알았어. 양은 내가 봐서 살게. 양파는 싫은데 그냥 고기만 볶아 먹으면 안 되나? 히히 "


딸은 자취를 하면서 편식이 더 심해지고 있다. 인스턴트식품이나 간편식에 익숙해지다 보니 싱싱한 채소나 과일의 섭취가 점점 준다. 집에 있을 때도 과일을 즐겨 먹지 않아 억지로 먹이는 수고를 했는데 이제는 간섭하거나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 그런 음식을 먹는 비율이 더 준 것이다.


간편식과 더불어 딸이 즐겨 먹는 음식은 육류다. 다른 재료는 요리하는 걸 귀찮아하면서도 육류는 지지고 볶더라도 요리를 한다. 그것이라도 하는 게 어디냐 싶어 요리를 한다고 하면 대견하다 말해준다. 단백질은 몸을 단단하게 해 줄 거라는 막연한 생각에 고기를 사서 먹는다면 '네가 건강을 챙기고 있구나' 하며 안심도 한다. 그러다 금세 고기를 먹으면 채소도 함께 먹어줘야 하는데 싶어 채소를 넣어 요리를 하라고 권하고 있다. 하지만 딸은 아직도 채소에 거부 반응을 보인다. 건강하지 못한 입맛 때문이다. 그런데 채소를 싫어하는 입이 샐러드를 좋아하는 걸 보면 그 또한 요상하다. 내 생각에 딸은 삶거나 볶아내어 흐물거린 채소를 싫어한다는 게 맞는 표현 같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여전하게 양파나 파를 음식에서 건져내어 그릇 옆에 고이 모셔두거나 그릇 테두리에 뺑둘러 벌레처럼 붙여놓아 가족들을 기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딸의 편식을 어머니께서 못마땅하게 여기신 건 당연한 일이다. 딸의 행동은 복 달아나는 행위라며 언짢은 표정까지 지으신다. 티브이에서 몸에 좋다는 음식이 나오기라도 하면 나를 불러 시청하게 하거나 본인이 본 프로그램에서 말한 몸에 좋은 음식들을 일일이 이야기하신다.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은 억지로라도 먹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아이들이 몸에 좋은 음식을 몰라서 안 먹는 건 아니다. 몸에 좋다는 걸 알면서도 입에 맞지 않으니 먹지 않는 것이다. 반면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이라도 입이 즐거워지고 머리가 행복해진다면 먹겠다는 식이다. 어린아이라면 좋다는 것을 어르고 달래서 억지로라도 먹이겠지만 성인이 다 된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하는 일은 간섭을 넘어 꼰대 짓이라 불릴 만하다. 게다가 집에서 아무리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다 한들 밖에 나가서 먹는 알 수 없는 그 많은 음식들은 또 어떻게 해결한단 말인가? 스스로 깨달아 먹지 않는 한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먹어서 죽는다.

법정스님은 '먹어서 죽는다'라는 글을 통해 60년대의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우리의 식습관은 큰 변화를 겪었다고 말한다. 채식 위주의 생활이 육식 위주로 바뀌었다면서 말이다. 육식은 우리의 전통 체질과 기질에는 맞지 않는 음식이고 우리가 육식을 계속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을 점점 죽이는 행위라 말하고 있다. 환경 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제레미 리프킨의 '쇠고기를 넘어서'라는 책을 인용해서는 개인의 건강을 위해서나, 지구의 생태계를 위해서, 동물 학대를 막기 위해서, 굶주리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고기 중심의 식생활 습관은 극복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법정 스님의 글만을 인용하자면 육식은 우리 자신에게나 동물들, 지구 모두를 위해서도 옳지 않은 식습관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육식을 포기할 수가 없다. 입이 느끼는 맛뿐만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도 육식은 필요하다. 식물성 단백질이나 생선 단백질에서도 우리 몸에 필요한 단백질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먹는 양이 고기에 비할 바는 아니다.


예전에 학원에서 아이들과 <아마존의 밀림은 햄버거를 싫어한다>란 주제로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브라질에서 소를 키우기 위해 아마존의 밀림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례를 들면서 말이다. 그때 아이들은 브라질의 경제 발전을 위해 아마존의 개발은 피할 수 없는 결과란 의견과 소에게 먹일 곡식을 제3세계 어린이들이나 친환경 연료를 만드는 일에 사용하면 미래를 위해서나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더 현명한 선택이 될 거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결론은 개발보단 육류의 사용을 줄이자는 쪽의 승이었다. 판정인의 입장에서 찬성 의견이 더 설득력이 있어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참하기도 했다.


법정 스님의 글이나 아이들과의 토론에서 얻은 결과만 놓고 보면 우리의 식탁에서 육류의 사용을 줄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론적으로 맞다 생각되는 문제가 현실에서는 행동으로 쉽게 옮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딸에게 건강을 챙기라고 말하면서 내가 몸보신으로 권하는 음식은 늘 육류다. 삼계탕을 끓여 먹었던 복날에는 포장된 삼계탕이라도 사 먹으라고 했고, 볶음밥이나 스파게티를 해 먹었다는 딸에게는 고기라도 넣어서 먹으라고 했다. 채소의 섭취가 고기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 고기를 건강식처럼 늘 권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의 마음이 그렇다. 건강을 위해서 균형 있는 식사를 하라고 말하다가도 무엇이든 잘 먹기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그쪽으로 기울고 만다. 두부나 생선을 사서 요리를 하고 나물이라도 무쳐 먹으면 좋겠지만 언감생심이다. 보내준 김치에 고기라도 구워 먹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토요일에 남편이 포도 2박스와 방울토마토를 사 가지고 왔다. 시누이가 보낸 복숭아까지 우리 집엔 과일이 넘쳐난다. 갑자기 자취생들이 사 먹지 못한 음식 1위가 과일이라고 말했던 딸이 생각났다. 과일을 먹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딸은 닭갈비를 구워 과일과 함께 먹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법정스님은 고기를 먹어서 죽는다고 표현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딸에게 고기를 먹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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