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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Dec 28. 2020

괜찮은 척 살았던 날들

엄마니까 이해해.

 '척'이란 함정의 실체를 알아버린 날


 갑자기 자신이 '척'이라는 가면 속에 나의 삶을 집어넣고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어. 솔직한 삶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삶으로 말이야.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속상해도 속상하지 않은 척,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하면서.


 왜 그런 생각을 했냐고? 며칠 전에 엄마에게 한바탕 퍼부었거든. 전화로 말이야.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말하지 않으니 내가 잘 먹고 잘 살아서 그런 줄 아냐고'.


 선전포고도 없이 쏘아대는 속사포에 엄마는 미처 대피도 하지  못한 채 가슴에 구멍이 뻥뻥 뚫렸거야. 그래놓고 마지막에는 날카로운 비수 한방으로 정점을 찍어버렸지. '전화는 내가 할 테니 기쁜 소식이 아니면 절대 전화하지 마'라는 막말로 말이야. 그저 큰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려 했던 엄마는 날벼락을 내 감정의 찌꺼기들만받아들고는 초토화된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쓸쓸히 퇴장을 했어. 어처구니도 없이 기가 죽어서 말이야.


 전화를 끊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 세상 인정머리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나에게 화가 나기도 했고, 조용히 듣기만 하다 "네 사정을 몰라서 그랬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얘기를 하지 왜 얘기를 안 했어"죄인이 된 것처럼 미안해 하는 엄마가 바보 같아서 말이야. 그동안 난 괜찮은 척하며 살았는데 그렇지 않았나 봐. 남편이 손을 다치고 그가 못하는 일을 대신하면서 난 스스로 내 자신이 대견하다 생각하며 살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거야. 난 나의 힘듦을 '척'이라는 이름 뒤에 숨기며 살았던 거지. 그러다 그 힘듦을 드러낼 만만한 대상을 만나고 말았던 거야. 나에게 가장 약한 사람, 늘 미안한 마음으로 날 쓰다듬으며 '자랑스러운 내 딸 어찌 네가 나한테 태어나서'라는 말로 가끔 베푸는 호의에도 몸 둘 바를 몰라하는 약하디 약한 나의 엄마에게 말이야.


 그런 일이 있고 며칠 후 김장을 하게 됐지. 올해가 가장 힘들 거란 건 예측 가능한 일이었어. 한 손으로도 할 수 있다며 남편이 도왔지만 전과 같지 않다는 건 짐작한 대로야. 처음으로 허리가 펴지지 않을 만큼 뻐근하게 김장을 했어. 그래도 밀린 숙제를 끝낸 것 같아 마음은 뿌듯했지. 뒷정리를 마치고 샤워를 한 후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개운해지네. 내 손으로 완성해놓은 김장통들을 보니 또 할 만한  일이었단 생각이 들지 뭐야. 몸이 편하니 마음이 여유로워졌나 봐. 사람 손이 무섭다는 건 맞는 말이었어. 그런데 문제가 생겼네. 매년 김장 때면 했던 일, 엄마에게 김장 김치 전해주기가 남았던 거야.


 남편이 자꾸 엄마에게 전화를 하라고 해. 김장김치를 전해주고 오자고. 그럴 입장이 아니라고 고집을 부려도 막무가내야.

'나쁜 인간, 내가 전화를 못하는 이유가 누구 때문인데...' 마음속에서 또 화가 치미네.

'이번 사태의 원인 제공자는 당신이야!'


 결국 전화를 했어. 엄마 목소리가 아무렇지도 않아. 전에 일을 잊어버렸나? 김장 김치를 가져간다고 하니 뭐하러 자신까지 챙기냐고 해. 늘 하던 말인 걸 잊었는지 또 하고 있네.


 엄마는 알고 있었어. '척'이란 가면 속에 숨은 나의 진짜 모습을.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 안타까워하고 있었을 뿐 가끔 그렇게 터트려가며 살아야 한다는 걸. 분노의 화살이 자신을 향하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줄 수 있다는 걸.


 김장 김치를 전하는 일로 엄마의 마음을 알고 온 못난 딸은 그렇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척'이란 가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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