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결혼을 평가하는 두 여자.

시어머니와 나의 딸.

by 은빛구슬
과거를 도는 뫼비우스의 띠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이 든 사람이다.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젊은 사람이고. 그 사이에 낀 존재는 현재를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나 현재를 이야기하는 사람 앞에서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람과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현재의 이야기를 인정하지 않고 뭉개버린다. 현재의 이야기를 평가절하 한다. 그리하여 현재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좌절한다. 현재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현재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고단한 삶을 인정받고 싶었던 거다. 그러나 그 삶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인정받지 못한 삶이 되었다.



복잡한 세상에 글까지 복잡하게 쓰고 싶지 않았는데 내 글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다시 정리해 보자. 대충 짐작은 하겠지만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의 시어머니이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의 딸이다. 현재를 인정받고 싶어 발버둥 치는 사람은 당연히 나일 테고.


나는 내 삶이 평범하거나 순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 삶을 이야기하고 글로도 쓰고 싶었다. 이야기를 해서 내 노력을 인정받고 싶었고, 그렇게 사는 것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알리고도 싶었다. 그런데 우스운 게 나의 삶이란 것이 과거를 산 시어머니에겐 기대에 못 미치는 부족한 삶이었다는 것이고, 미래를 살 딸에겐 과하게 넘치는 어리석은 삶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시어머니에게도 딸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 거다. 세대 차이라는 흔한 범주안에서 나의 시집살이는 그렇게 두 갈래의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시는 '나 때는 말이다'란 말이 참 불편하다. 거기엔 전형적인 꼰대의 훈계와 자기 연민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분명 옳은 말인데도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쉬는 날이면 집안일을 한다. 일주일 간 먹을 음식을 준비하기도 한다. 김치라도 담글라치면 아침 일찍 일어나 공판장에 가서 배추를 사다 절여 놓는다. 배추를 절이고는 양념을 준비한다. 고춧가루에 젓갈 외 다채로운 채소를 손질하여 넣고 서로의 맛이 잘 어울리도록 버무려 놓는 일로 대강 준비를 마무리한다. 저녁이 되면 배추에 양념소를 발라 김치를 담그고는 김치가 담긴 김치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스스로 고생했다는 말로 생색을 낸다. 그러면 시어머니께서는 반사적으로 저 말을 내던지신다.


"이 정도의 고생은 고생도 아니지. 나 때는 말이다. 김치 담는 일 정도는 매일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니 시할아버지께서 막 담은 김치를 좋아하셔서 나는 새벽마다 학독(돌확)에 양념을 갈아 김치 담는 일을 했다. 드시면서 "맛있다. 맛있다"란 말씀을 하시는데 며느리 입장에서 그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았던지 그 일을 매일 해야 했지. 그때는 정말 내 몸 아까운 줄 모르고 썼다. 어디 그거 뿐인 줄 아냐..."


나이가 들면 말이 많아진다. 난 그걸 시어머닐 통해 알게 되었다. 말할 상대가 없는 낮 시간이면 시어머니께선 텔레비전과 대화를 하신다.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나오면 노래를 잘했다고 칭찬을 하고, 드라마를 볼 때면 감정이입이 되어 본인이 등장인물이 되어버리신다. 처음엔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인가 놀라기도 했다. 방안에 혼자 계신 분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계셨으니 말이다. 그러다 그게 텔레비전을 보시면서 생긴 어머니의 습관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어색했지만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두 분이 함께 계셨기에 서로 대화를 하신 거라 여겨 그 버릇을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난 어머님의 그런 행동이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어 생긴 버릇이라 여겼기에 어머니께서 이야기를 하실 때면 늘 귀를 열고 경청을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과거로 타임 슬립 되어 뫼비우스의 띠를 타고 과거를 향해 끝을 모르고 돌고 또 도는 것이다. 돌고 돌아 도착한 시작점이자 종착역인 곳에서 내린 결론은 '너는 좋은 시대에 태어난 줄 알아라. 좋은 시대에 태어났으니 시집살이란 것도 모르고 살지. 그걸 복으로 알고 늘 웃으며 생활해야 한다.'라는 것이다. 결국 내가 시집살이라 생색내는 시집살이는 말이 아까울 정도로 아무것도 아니란 뜻이 된다. 어머니의 시집살이에 비하면 나의 시집살이는 조족지혈이다 못 박는 말이다.


난 그렇게 살지 않아


그럼 딸의 경우는 어떤가? 딸은 내가 답답하다고 한다. 집에 얽매이고 가족에 얽매여 자신의 삶을 잃은 듯한 모습이 싫다는 거다. 자신은 헌신이란 이름으로 부모와 자식을 위해 살아갈 자신이 없으니 결혼 같은 건 하지 않고 살겠다고 한다. 딸의 눈에 나의 시집살이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이 꿈꾸는 결혼 생활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딸에게 미안했다. 딸은 엄마의 모습을 보고 결혼에 대한 환상을 품을 만도 한데 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직장일에 집안일까지 하는 엄마는 딸이 꿈꿀 만한 미래의 모습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딸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할머니가 힘들었다 하면서도 자꾸 과거를 이야기하고, 엄마가 힘들다 하면서도 가족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하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데서 나온 행동이었다는 것을. 자신도 삶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니 어떤 고난과 좌절이 찾아들어도 극복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시어머니와 딸은 나의 결혼에 대해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그 평가를 두고 누구의 평가가 더 옳은 것이다 말할 순 없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을 뿐이었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가 살았던 시대에서, 나는 나의 시대에서, 그리고 딸은 다가올 미래의 시대에.


우리는 서로 다른 시대에 결혼 생활을 했고, 앞으로 할 것이지만 자신의 삶이 소중하다는 본질만은 잊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누구의 삶이 옳고 누구의 삶이 훌륭했다 말하지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삶은 시대를 막론하고 소중하다. 세대 차이는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를 뿐이지 삶을 책임지고 살아간다는 의미에서는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과거의 이야기와 현재의 이야기, 미래의 이야기는,


오늘도 한 자리에서 서로의 호흡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작년 가을에 찍은 꽃무릇 사진이다. 꽃무릇은 꽃과 잎이 서로 다른 시기에 피는 꽃이다.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돋아난다. 꽃과 잎은 서로를 만나지 못해 그리워한다. 비록 꽃과 잎이 다른 시기에 필지라도 꽃무릇이란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꽃도 꽃무릇이요. 잎도 꽃무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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