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하는 남편, 짠하다.

가장의 무게도 왕관의 무게만큼 무겁다.

by 은빛구슬

남편을 험담하는 글을 썼다. 아들 가슴에 못을 박았다고 분노하며 감정을 쏟았다. 그런 글을 주말 동안 많은 분들이 읽어 주며 조회수는 늘었다. 그런데 그 글을 보는 지금의 내 마음은 편치가 않다. 순간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토해낸 글로 난 내 남편을 세상에서 둘도 없는 몹쓸 아빠로 만들어 버렸다. 도대체 나란 여자가 그럴 자격이나 있는 것인지... 쯧쯧.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남편을 평가할 만큼의 자격을 갖춘 사람은 못 된다. 결혼 생활 동안 남편이 들인 만큼의 노력과 수고를 하지 않았고, 시집살이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가련한 며느리 코스프레로 남편에게도 나와 똑같은 희생을 강요했다. 어쩌면 시집살이가 아녔더라도 결혼 생활에는 나름의 어려움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 무슨 문제라도 발생할라치면 그 모든 것을 시집살이와 결부시켜 문제로 삼았으니 반성해야 한다.


남편에게는 가장으로서 져야 할 무게가 있었다. 하지만 난 그것은 차치하고 나의 힘듦만을 부각했다. 남편에게도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 고통이 존재했을 텐데, 난 남편의 정신적 고통은 인정하지 않은 채 육체적 고통을 겪는 남편보다 정신적 고통을 겪는 내가 더 고차원적이고 강한 스트레스에 눌려있다고 생각했다. 이게 무슨 억지고 궤변이고, 개논리인지 모르겠다.


토요일 김장을 했다. 남편은 목요일, 금요일 이틀 동안 연가를 내고 김장 준비를 했다. 목요일에는 재료를 준비하고, 금요일에는 재료를 손질하여 소(양념)를 만들었다. 토요일에 비비는 일만 내가 했다.

남편은 재료를 계량화 하기 위해 메모를 해 두었다.


올해의 김장은 배추 절이는 일은 하지 않아 그나마 다른 해보다 좀 더 수월했다. 그러나 이는 양념을 만들지 않은 나의 무지한 발언이다. 남편에게 있어 김장의 강도는 작년이나 올해 별 차이는 없었을 것이니.


내가 재료를 씻어주고 학원을 간 후, 남편은 무와 당근을 채 썰고, 갓, 미나리, 쪽파를 자르고, 대파와 양파를 썰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마늘과 생강과 청각은 잘게 다졌겠지.


이렇게 야채 손질을 끝내고는 액젓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집에선 멸치젓, 새우젓, 황석어젓. 이 세 가지 젓갈을 섞어 액젓을 만든다. 첫 번째 액젓은 간을 맞추기 위한 것이니 절대 물을 섞으면 안 된다. 첫 물을 따라놓고 가라앉혀 위의 맑은 물만 쓴다. 두 번째 액젓은 물을 붓고 끓인다. 두 번째 물도 따라놓고 가라앉혀 위의 맑은 물을 쓴다. 세 번째 액젓도 그런 식으로 끓여주면 모든 젓갈은 뼈만 남긴 채 자신의 임무를 마친다. 남편은 불 앞에서 이 과정을 반복해 가며 액젓을 만든다.


그다음은 찹쌀죽 쑤기다. 찹쌀은 하루 전에 물에 불려 두어야 한다. 잘 불려둔 찹쌀에 물을 붓고 죽이 될 때까지 저으면서 끓여야 한다. 눌지 않도록 저어 주어야 하니 이 또한 고달픈 일이다.


이렇게 찹쌀죽까지 쑤고 나면 모든 재료는 함께 섞는다. 큰 대야에 야채와 각종 양념, 고춧가루, 두세 번째 뽑아낸 액젓, 찹쌀죽을 넣고 저어준다.

배추를 비비다 소를 찍었더니 내용물이 많이 줄었네

이렇게 양념이 만들어지면 모든 준비는 끝났다고 보면 된다. 금요일 밤에 양념을 만들어 놓고 토요일에 비비면 양념 색은 더 선명해지고 빨개진다.


김장 준비의 모든 과정은 늘 남편이 도맡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김장의 일부는 혼자 사시는 친정 엄마에게도 갔다. 결혼하고 20년, 이 일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나는 남편의 그런 수고를 당연하게 생각했다. 고마운 일은 잘 표현하지 않았고, 서운한 일엔 바로 반응했다.


나는 속이 좁은 사람이다. 남편을 밴댕이 소갈딱지라고 흉 본 나는 그보다 못한 소갈머리를 가진 새끼 밴댕이의 소갈딱지다.


이번 김장을 하면서 남편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감에도 자신이 해야 할 일에는 게으름 피우는 일 없이 발 벗고 나서는 사람. 누군가는 공무원들이 편하게 직장 생활을 한다고 쉽게들 얘기하지만 남편은 7시면 집을 나서 업무를 시작한다. 심지어 홍보과에 근무했을 땐 5시도 안 된 첫새벽에 출근해서 신문을 스크랩하고 보도 자료를 작성했다. 그 열정은 지금도 사그라들지 않고 있으니 내 남편은 지금도 직장 생활을 편하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아는 작가분이 내가 남편과 아이들의 관계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자, 내가 가진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며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라고 하셨다. 나에겐 요리하는 남편까지 있지 않냐며. 맞는 말이다. 이렇게 김장까지 하는 남편이 우리나라에 과연 몇이나 될까?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했던가?

가장의 무게 역시 왕관의 무게에 뒤지지 않았을 텐데 그 무게를 견디며 고추의 알싸함까지 몸에 품은 남편이 오늘은 짠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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