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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Oct 08. 2020

누군가를 기억하게 하는 음식

딸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


 식혜를 만들었다. 식혜란 말을 들으면 남편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린 시절의 딸을 떠올린다. 식혜는 딸을 상징하는 음식이다. 그래서 딸이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면 우리는 제일 먼저 식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딸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 도대체 딸의 식혜 사랑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근원을 찾으려면 딸이 세상과 눈을 마주하기 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딸을 임신했을 때 심하게 입덧을 했다. 아무리 상큼하고 개운한 음식을 먹어도 몇 끼를 못 넘기고 금세 질려하던 때였다. 그러던 때 어머니께서 끓여주셨던 식혜는 울렁거리던 속을 깔끔하게 풀어주는 음식이 되었다. 식혜의 달달한 맛을 생각하면 오히려 속은 더 느글거릴 것 같은데 웬일인지 식혜를 끓일 때 나는 엿기름의 달큰한 냄새만 맡아도 울렁거리던 속이 가라앉는 묘한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그때부터인 것 같다. 엄마의 뱃속에서 엄마와 같은 기분을 느꼈을 딸이 지금 이렇게 식혜를 좋아하게 된 이유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일이 있는데 딸이 네댓 살쯤 되었을 때 치른 어느 제삿날의 일일 것이다. 그날은 모처럼 모인 사촌 언니, 오빠들로 인해 딸이 늦도록 잠을 자지 않았다. 보통 때라면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인데도 딸은 잠을 자지 않고 제사 지내는 걸 지켜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익숙한 패턴을 거스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딸은 제사를 지내는 동안 소리도 없이 찾아온 잠의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앉은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의욕은 넘쳤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그 모습이 하도 재밌어 기족들 모두 킥킥거리며 지켜보고 있는데 딸은 몸을 앞뒤, 좌우로 흔들면서도 넘어지지 않는 장기를 부리며 잠꼬대까지 해댔다. 그런데 그 잠꼬대가 가관이라 우리는 또다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딸은 꿈속에서도 식혜를 갈망했는지 식혜~, 식혜~ 하며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닌가. 꿈속에서까지 식혜라니. 그 모습을 보고 한바탕 웃는 통에 딸이 잠에서 깨고 말았다. 잠에서 깬 딸은 어린 나이에도 무안함을 느꼈는지 웃는 우리를 향해 울음을 터트렸다. 잠은 오지, 제사 자리에는 있고 싶지, 짜증스러움이 복합된 마음은 폭발하여 대성통곡으로 나타났다. 잠뜻을 하는 것인지 아무리 달래도 딸의 울음은 그칠 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난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꿈속에서 딸이 그토록 노래를 불렀던 식혜를 가져온 것이다. 식혜를 받아 든 딸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에 미소를 띠며 식혜를 받아 들었다. 그때, 알아봤다. 딸의 식혜에 대한 무한 사랑을.


 이렇게 딸은 나와 함께 뱃속에서부터 식혜를 좋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와 딸의 식혜 취향에는 차이가 있다. 나는 갓 끓여낸 뜨끈한 식혜를 그릇째 들고 후후 불어가며 들이키는 걸 좋아하고, 딸은 김치 냉장고에서 살얼음이 살짝 언 식혜를 수저로 툭툭 깨서 먹는 차가운 식혜를 좋아한다. 둘 다 시원한 식혜를 좋아하지만 나는 뜨거움이 주는 시원함을 딸은 차가움이 주는 시원함을 좋아하는 것이다. 시원함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둘 사이의 시원함에는 온도 차이가 존재한다.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들을 생각하면 딱히 떠오르는 음식이 없다는 것이다. 딸 때와는 달리 아들 때는 입덧이 없었다. 그저 먹는 것이 좋아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었던 기억만이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아들은 음식 취향이 까다롭지 않은 고마운 입을 갖고 태어나 주었다. 그런데 억울하게도 그 고마움은 아들을 개성 없는 입맛의 소유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아들 하면 특별히 떠오르는 음식이 없어 항상 무엇을 만들어줄까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마트에서 간식을 고를라쳐도 한참을 생각해야 한다. 아무거나 사도 아무 말 없이 먹을 아들이지만 이왕 사는 거 아들이 더 좋아하는 것이면 좋겠다 싶은 마음에서인데 이마저도 쉽지가 않다. 무난하고 개성 없는 입맛은 고마운 마음과 달리 그 사람을 쉽게 떠올리지 못하게 한다.


나를 기억하게 만드는 음식

 

 딸과 아들의 음식 취향을 보며 생각했다. 우리가 누군가를 떠올렸을 때 그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체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 매개체가 음식이면 음식을 먹거나 볼 때마다 그 사람이 떠오를 것이고, 매개체가 물건이나 자연이면 그것을 쓰거나 볼 때 역시 그 사람이 떠오를 것이다. 이렇듯 어떤 형태의 매개체든 그것은 나와 타인을 잇는 다리가 되어준다. 그런데 그런 매개체가 없다는 건 나와 타인을 잇는 다리가 없어진다는 말과 같다. 그 사람을 기억할 방법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계절에 날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줘야겠다고.


 "딸과 아들, 잘 들어.

 엄마는 봄에는 딸기를 먹어야 하니 봄에 딸기를 보게 되면 엄마를 생각해. 여름에는 옥수수를 보며 엄마를 생각하고, 가을에는 주황색의 예쁜 감만 봐도 엄마를 떠올려야겠지. 겨울에는 고구마 특히 군고구마를 볼 때마다 엄마를 떠올려야 해. 그리고 기억해. 너희가 직장인이 되어 돈을 벌게 되면 계절마다 엄마를 위해 저 음식들을 사들고 와야 한다는 걸. 그 보다 더 먼 훗날 엄마가 이 세상에서 없어진 날에는 저런 음식을 보며 엄마를 떠올려야 한다는 거."


 비겁하게 들릴지 모르나 나는 또 이렇게 아이들의 기억 속에 남는 방법 하나를 강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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