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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Aug 25. 2020

미안하다, 녹두 빈대떡. 내가 널 만만히 봤다.

이 여름에 녹두 빈대떡이라니.

녹두빈대떡 지옥에 빠진 날


주말이면 '무엇을 먹을까'로 고민을 하게 된다. 외식이 줄어들었으니 그것을 대체할 만한 특별한 음식이 필요한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주중에 하지 못한 음식을 주말의 넉넉한 시간을 무기 삼아 도전을 하게 된다. 물론 내 손으로 만든 음식이 시켜먹는 음식을 능가하지 못하면 과감하게 버리는 게 상책이다. 맵단의 정수를 보이는 치킨을 우리 집 부엌에서 흉내 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노릇이고, 도우도 못 만들면서 피자에 도전하는 일 따위는 어리석음의 극치다. 그런데 만만해 보이는 음식, 그건 당연히 내 도전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 마치 이번 일요일의 녹두 빈대떡처럼 말이다.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남편이 나주에서 곰탕을 사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이니 몸보신으로 나주곰탕을 먹고 싶다'를 노래 불렀지만 어머님이 좋아하는 갈비탕만 사나르고,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모처럼 생긴 여유에 나주까지 가 곰탕을 사 온 것이다. 어찌나 고맙던지 김치와 깍두기만 놓인 조촐한 식탁 앞에 앉아 뜨끈한 곰탕 국물을 물냉면 마시듯 시원하게 먹어치웠다.


곰탕을 먹고 남편의 고마움에 나도 보답을 해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쌀통 위에 놓인 봉지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마땅한 용도를 찾지 못해 방치해 두었던 깐 녹두였다. 녹두를 불려 재료만 섞으면 시장에서 파는 녹두빈대떡의 맛을 재현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전에도 녹두빈대떡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녹두 가루를 사서 만들어서인지 시장에서 파는 녹두빈대떡의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직접 녹두를 직접 갈아 만들면 시장에서 사 먹었던 녹두빈대떡 맛을 살려낼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물론 반죽을 감싸 안을 넉넉한 기름이 있다면 금상첨화일 테고.

700g이라는 양을 무시하면 안 된다. 그 양이 궁금하시면 불려 녹두빈대떡을 만들어 보시라.

토요일 저녁에 불려둔 녹두는 일요일엔 몸이 두 배로 늘어나 있었다. 묵직하게 몸집이 어난 녹두를 여러 차례 헹궈서 껍질을 벗겨냈다. 깐 녹두의 껍질은 기분 좋을 정도로 잘 벗겨졌다. 시원한 물에서 시원스럽게 벗겨지는 녹두를 만지고 있자니 기분까지 시원해졌다. 초록의 옷을 벗고 노란 자태를 드러낸 녹두는 그 자체로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녹두로 빈대떡 만들 생각을 하다니 내 자신이 대견스럽기만 했다.


녹두가 준비되었으니 녹두와 섞일 재료가 필요했다. 숙주나물은 씻어내어 새끼손가락 마디 정도로 잘라 두었다. 김장 김치는 손에 잡힐 정도의 양을 꽉 짠 후에 양념을 털어내고 다지듯 잘라두었다. 돼지고기는 채 썰어 참기름과 마늘, 파, 생강, 소금, 후추, 맛술 등과 함께 버무려 주었다.


불린 녹두는 믹서기에 넣어 비슷한 높이로 물을 넣고 갈았다. 갈아낸 반죽에 준비한 숙주나물, 김치, 돼지고기를 넣고 마지막으로 색과 맛을 위해 청양고추와 홍고추는 덤으로 넣어주고 소금으로 간을 한 후 마무리했다. 이제 기름 위에서 지져내기만 하면 완벽한 녹두빈대떡이다.

'거 봐, 녹두 빈대떡 그거 별 거 아니잖아.'


그런데 내가 녹두 빈대떡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 시장에서 전문가분들이 여러 개의 빈대떡을 착착착 넘기고, 탁탁탁 만들어내던 모습만을 상상했던 나는 프라이팬에서 하나씩, 하나씩 빈대떡을 만들어 내다 결국 지쳐버렸다.


처음 시도는 좋았다. 처음에는 한 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네 개씩 만들었다. 정성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만들어도 반죽이 줄 기미가 없었다. 그다음에는 크게 하나를 만들었다. 인덕션이 뜨거워질 때까지 망부석이 되어 반죽을 넣고, 뒤집고, 꺼내기를 반복하며 만들어냈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동안 빈대떡의 두께는 점점 더 굵어졌다. 결국에는 반죽을 붓고 의자에 앉아 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인덕션 앞으로 가 뒤집는 일만 했다.


인덕션은 무서울 정도로 뜨거워졌다. 빵빵한 에어컨에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서도 여름날의 녹두 빈대떡은 해선 안 될 요리였다. 지지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반죽을 펴고, 뒤집고, 꺼내는 반복적인 행동은 온몸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남이 쉽게 하는 일이면 나도 쉽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오산이었다. 그들이 쉽게 했던 행동은 그들 노력의 결과였고, 자연스러운 행동은 익숙함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아무리 쉬워 보이는 일도 꾸준히 하지 않으면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그걸 했기에 쉬워 보였던 것이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 했던 나는 크지도 않는 코를 다친 것이다.


처음 만든 녹두 빈대떡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다음에 만든 빈대떡도 순식간에 꿀꺽했다. 세 번째는 조금씩 찢어 먹었고, 요리가 끝난 후 상에 차려진 빈대떡? 젓가락도 대지 않았다.


남편과 어머니께서 맛있게 드셔주셔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지만...

깐 녹두 700g, 저 작은 봉지의 위엄은 대단했다.


녹두빈대떡, 널 만만히 봐서 미안하다.
냉동실로 들어간 빈대떡이 얼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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