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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Nov 13. 2020

고구마의 변신은 무죄

고구마 철이 언제?

 고구마 철?

 

 고구마가 제철이란다. 그런가? 의문이 들지만 여기저기서 제철이라니 그런가 보다 한다. 솔직히 난 고구마 철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아주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고구마 철은 겨울이었다. 겨울이면 할머니 방 한 귀퉁이에 고구마 뒤주가 만들어졌다. 뒤주에는 산더미 같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의 고구마가 쌓였다. 그 많은 걸 언제 다 먹나 싶지만 거대해 보이던 높이는 어느새 모래성처럼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린다. 기나긴 겨울밤 고구마는 우리의 입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요긴한 간식거리가 되었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고구마 철은 분명 겨울이다. 그런데 햇고구마를 언제 먹었나 생각해보면 고구마 철이 여름 아냐? 하는 생각도 든다.


 난 늘 휴가가 끝날 무렵인 8월 중순에 햇고구마를 먹었다. 그때를 시점으로 먹기 시작한 고구마는 겨울철의 꿀고구마에 이르러 절정을 이뤘다. 계절마다 어울리는 고구마가 따로 있음도 이제는 다. 포글포글한 밤고구마가 어울리는 계절이 있고, 찐득한 꿀고구마가 어울리는 계절이 있다. 미식가가 아니어도 고구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계절에 어떤 종류의 고구마를 먹어야 하는지 정도는 안다.


 8월의 햇고구마는 은은한 단맛이 도는 포글포글한 밤고구마다. 아직은 땀이 삐질삐질 나는 여름날, 밤고구마를 삶아 반으로 부러뜨리면 포근한 흰 살의 밤고구마가 모습을 드러낸다. 호호거리며 먹는 햇고구마에서는 말 그대로 밤맛이 난다. 그 맛이 좋아 남편과 나는 휴가가 끝날 무렵이면 해남 화산을 찾아 고구마를 사 오곤 했다. 여행하듯 찾은 해남에서 막 캐낸 고구마를 살 때는 첫 만남의 설렘까지 사 올 수 있었다. 그런데 겨울에 먹는 밤고구마에서는 여름 끝자락에 먹은 햇고구마의 맛이 나지 않았다. 밤의 포글포글한 맛이 사라진 것이다. 밤맛이 사라진 밤고구마는 밤고구마의 자격을 잃었다. 그런 이유로 겨울철에 먹는 고구마는 다른 종류여야 다.


 겨울철 고구마는 황금빛 살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 꿀고구마와 호박고구마가 딱이다. 찬 바람이 부는 겨울날에 먹는 고구마는 삶은 고구마보단 꿀이 잘 배어 나온 군고구마여야 한다. 잘 구워진 꿀고구마에서는 서너 개만 먹어도 속이 다리는 행복한 고통을 맛볼 수 있다. 그 고통을 알면서도 나는 예닐곱 개가 되는 고구마를 먹어 가슴을 타고 오르는 속 쓰림을 경험한다. 그러고도 고구마에 눈길이 가니 나란 사람은...

오븐에서 구운 밤고구마. 군고구마는 밤고구마보다 꿀고구마가 맛있다.

 오래전 인덕션을 설치할 때 오븐을 버릴 수 없었던 건 순전히 군고구마 때문이었다. 오븐을 버리면 고구마를 구울 수 없다. 군고구마는 겨울철 내 몸이 느끼는 최고의 낙인데 그걸 포기할 순 없었던 거다. 요즘은 에어 프라이기로도 고구마를 굽는다지만 굽는 정도나 양을 따지면 오븐만 한 게 없다. 지금도 고구마를 구울 때면 그때의 선택에 미소가 저절로 인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 것처럼.


 군고구마를 보니 여름에 먹다 남은 맥주가 생각났다. 이상하게 여름만 지나면 맥주엔 손이 가지 않는다. 그걸 써야겠다 싶어 고구마튀김을 하기로 했다. 군고구마도 있는데 고구마튀김을? 그래도 생각난 김에 하기로 했다. 먹다 남은 군고구마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전자레인지에 돌리면 본연의 맛을 살릴 수 있다. 고구마튀김은 에어 프라이기에 넣어 기름을 쏙 빼면 더 바삭거리게 먹을 수 있고. 먹을 게 많아도 보관만 잘하면 나중에라도 먹을 수 있다는 얘기다.


 고구마튀김은 요린이도 쉽게 할 수 있는 요리다. 고구마를 잘 씻어 얇게 썰고, 튀김 가루에 맥주를 부어 반죽의 농도만 맞추면 재료 준비는 끝이다. 그다음은 튀김기나 볼이 넓은 그릇에 기름을 넣어 뜨겁게 끓인 뒤 고구마를 튀겨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고.


 고구마를 썰다 힘이 들면 마음대로 깍둑썰기를 하여 그대로 튀겨낸 뒤 고구마 맛탕을 해도 된다. 내가 그렇게 했다. 힘이 들어서. 고구마 맛탕의 시럽을 만들 때 물과 설탕의 양은 동량이어야 한다. 종이컵 한 개 반 정도의 설탕이면 똑같은 양의 물이 필요하다. 설탕과 물을 끓일 때는 젓지 않고 그대로 둬야 윤기 나는 시럽을 만들 수 있다. 튀긴 고구마에 시럽을 묻혀내면 고구마 맛탕이 되는 것이고, 시럽을 묻히는 것이 힘들어 튀긴 고구마를 시럽에 모두 집어넣고 마구 저어버리면 하얀 설탕 덩이가 붙은 고구마 과자가 된다.


 군고구마를 먹으려다 고구마의 무한 변신만 보았다. 고구마튀김에서 고구마 맛탕으로, 고구마 맛탕에서 고구마 과자로.


 고구마가 제철이라더니 맞는 말인 거 같다. 요즘 들어 고구마를 가장 많이 먹고 있으니 말이다. 군고구마의 향기가 온 집안을 뒤덮고 있는 지금 나의 고구마 먹방은 시작되었다.

고구마 튀김, 고구마 맛탕, 고구마 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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