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빛구슬 Jan 28. 2021

'자식은 나이가 들어도 부모에겐 어린애'란 말

저 내려요.

내려 주세요

 

 "어어~어. 안되는데. 내려야 하는데. 어떡하지? 어디에다 말을 해?" 허둥거리느라 집중할 수가 없었다. "너 캐리어는? 아빠는 도대체 어디 계시는 거야?" 발을 동동 구르며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남편이 없었다. 황당한 일에 무엇부터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기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나는 내려야 했고, 남편이 들고 갔던 딸의 캐리어도 찾아야 했다.


 딸을 자리에 앉히고 남편을 찾아 다음 칸으로 향하다 통로에서 주인을 잃은 채 덩그러니 놓여있는 딸의 캐리어를 발견했다. 남편은 밖에서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창문을 두드려 남편을 불렀지만 허사였다. 들릴 리 만무하다. ktx 창문이 그리 허술하려고. 캐리어를 끌고 와 딸 옆에 앉아 어이없이 웃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안 내리고 뭐 했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다음 역에서 내려 빨리 돌아와"


 나는 표도 없는 무임승차자가 되었다. 역무원을 찾아 상황을 설명하고 표를 구입해야 한다. 딸에게 조심해서 올라가라는 말을 남기고 역무원을 찾아 앞으로 전진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손잡이를 내렸을까? 저 쪽에서 걸어오는 역무원을 발견했다. 평소 같았으면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을 그분이 그때만큼은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을 만큼 반가웠다. 얼굴을 보자마자 두서도 없이 내려야 하는데 내리지 못했다며 어린애처럼 징징거렸다. 기차를 잘못 탔냐는 물음에 딸을 배웅하러 올랐다가 못 내렸다 하니 그분 역시 남편의 말대로 다음 역에서 내려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다음 역까지는 요금을 내지 않아도 되지만 내려올 때는 표를 사야 한다는 말에도 그게 어디냐 싶어 넙죽 인사를 했다. 심년감수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 역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더 다행인 건 다음 역은 ktx가 경유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운 좋게도 내가 내리는 그 시간 대에 그곳을 지나는 ktx가 있어 나를 싣고 내려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다음 역까지 가야 할 판이라 했는데. 역시 운 좋은 사람은 다르구나 싶었다. 그런가?


 그날은 뭔가 이상했다. 보통은 기차가 정차해 있어 해당 칸을 찾아 들어가면 됐는데 그날은 기차가 도착해 있지 않아 중간쯤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딸이 타야 할 칸이 16호 칸이었으니 그 앞에서 기다리면 됐음에도 그러질 않고 뭔 생각으로 중간쯤에서 기다리다 움직인 것이다. 거기서도 문제였다. 뒤로 가야 할 사람들이 앞으로 가고 있었다. 남편이 '어, 이쪽이 아니네' 했을 땐 이미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남편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고 딸과 나는 뒤따르다 기차에 오르는 남편을 보고 15호 칸에서 기차를 탄 후 16호 칸으로 이동했다. 16호 칸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남편이 없었다. 그리고 앞의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남편은 기차가 출발할 기미가 보이자 16호차와 17호차 사이에 캐리어를 놓고 내렸던 것이다. 내가 탔을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다면서.


 내가 정읍까지 갔다 오자 남편은 혼자만의 여행이 즐거웠냐며 놀렸다. 딸만 태우면 됐지 뭐하러 나까지 탔냐며 나무라기도 했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왜 그랬지?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나 생각해보니 그렇지도 않다. 나는 늘 딸과 함께 기차에 올라 딸이 자리에 앉는 걸 보고 내렸다. 어린애를 혼자 보내는 기분이 들어서다. 그랬던 걸 생각하면 일이 발생한 그날이 특별한 날이었던 게 틀림없다. 잘 구르던 수레바퀴가 돌부리에 삐걱거린 것처럼 인생길에서 내 몸이 잠시 흔들렸던 것이다.


 집에 도착해 생각해 봤다. 딸이 캐리어를 끌고 노트북이 든 가방에 쇼핑백까지 짊어지고 들어왔을 때는 다 컸다는 생각에 대견해했다. 자신의 일은 충분히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런 딸과 일주일을 지내다 보니 나에게 딸은 다시 어린애가 되었다. 달라진 게 없었는데 내 품이 그리 만든 것이다. 그런 어린애가 짐보따리를 끌고 지고 가는 것을 어찌 보겠는가? 그러다 그날, 그 낭패를 본 것이다. 올 때처럼 끌고 지고 들게 했으면 아무 일이 없었을 텐데 혼자서도 너끈히 살아가는 딸을 어린애로 봤다. 그런 나의 행동을 불편해하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이제는 인정을 해야 한다. 품을 떠나서든 내 품에 있든 다 큰 자식은 다 큰 자식이라고. 어린애가 아니라고.


 

 그런 생각을 하면 뭐하나. 딸이 도착할 시간이 되었을 때 난 이미 폰을 들고 있었는데.

 "ㅁㅈ야, 잘 도착했어? 도착했으면 도착했다고 전화를 해야지."

 "짐이 많아서 택시를 탔더니 좀 막혔어. 잘 도착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엄마, 내가 냉장고에 뭘 좀 넣어놓고 왔거든. 그거 내가 다음에 내려갈 때까지 잘 보관해 줘."


 전화를 끊고 도대체 뭘 두고 가서 저러나 싶어 냉장고 문을 열었다. 특별한 게 없었다. 뭐지? 뭘 두고 갔지? 뭐. 야.


 딸이 두고 간 건 완성되지 않은 애기 눈사람이었다. 앙증맞고 귀여운 게 냉장고에서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 웃음이 났다. 이런 너를 두고 다 컸다 인정해야 하다니.


 구순의 노인이 칠순의 자식을 보고 차 조심하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게 맞다. 나이가 들어도 자식은 부모 눈엔 여전히 어린애다.

  

이전 13화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엄마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