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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Nov 04. 2021

엄마 아니고 이모 맞네

가족의 생일을 잊고

가족의 생일을 잊었다

"아! 우리 과 서무가 그러는데 내일이 내 생일이래"

옆에서 부산스럽게 저녁 준비를 하던 남편이 문맥도 없이 툭 한마디를 내던진다.

"생일?"

순간 나의 손은 멎었다. 머릿속은 회색 안개가 꼈고 생각은 정지되었다. 입을 벌린 채 멍한 눈으로 남편을 바라보다 식탁 앞 달력을 향해 달려갔다. 날짜를 확인했다. 음력 9월 24. 올해는 10월 29일. 남편 생일이 맞다.

"아~~ 어떡해, 어떡해.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산 거야. 어~떡~해. 생각도 못하고 있었어."

발을 동동 구르며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남편 생일이 문제가 아니었다. 중요한 걸 놓쳤다. 나 자신을 한없이 원망해야 했다. 그래도 흘러가 버린 시간은 잡아올  없었다.


나에게 10월은 그렇게 흘려보내서는 안 되는 달이었다. 그저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세월아, 네월아, 너는 흘러가는구나' 유유자적 신선놀음에 빠져서도 안 되는 달이었다. 그 속에 가수 이용이 노래한 '10월의 마지막 밤'이 있어서도 괴기스러운 핼러윈 축제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것들과 무관하게 10월은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의 10월의 시간 속에는 음력으로 생일을 쇠는 남편과 딸, 아들의 생일이 들어있다. 가족 대부분의 생일이 이 달에 있는 것이다. 올해는 아들의 생일이 10월 첫째 주 금요일이었고, 둘째 주 금요일엔 딸의 생일이 있었다. 그리고 딸의 생일 2주 후가 남편의 생일이다. 남편의 생일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는 말은 아들과 딸의 생일은 지나도 한참 지났다는 뜻이 된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일이란 말인가. 바쁜 일이 있었던 것도 그렇다고 특별히 머리 쓴 일도 없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았던 걸까. 한가하게 세월 향락에 빠져 살았나? 아님 일을 너무 열심히 했나? 이도 저도 아닌데.


"아~ 역시 이모는 달라. 내가 왜 그대를 ㅁㅈ이모라고 부르는지 알겠지? 빨리 ㅁㅈ에게 전화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남편이 문책에는 공범자로서의 부끄러움이 없다.

"뭐래. 자기도 잊고 있었으면서. 아저씨가 전화해서 미안하다고 말하세요. 용돈도 좀 넉넉히 주고."

미안한 마음에 전화조차 들지 못했다.


전화를 받은 딸은 친구들이 챙겨줘서 생일을 무사히 보냈다고 했다. 엄마 아빠가 까먹은 생일을 친구들이 챙겨줬단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이러니 딸의 입에서 부모보다 친구가 더 좋다는 말이 나오지.


'아이고, 인간아 정신 좀 차리고 살아라. 자식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못 될 망정 비빌 언덕 정도는 되어 줘야 않겠니'

이렇듯 뒤늦은 후회에는 늘 죄책감과 아쉬움이 함께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 1년 365는 똑같은 의미로 나열되지 않는다. 매끈하게 흘러가다가도 툭툭 불거져 나와 발을 거는 날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날들 앞에서는 잠시 발을 멈춰야 한다. 멈춰 서서 불거진 이유부터 알아내야 한다. 그날들은 대체로 카이로스의 시간일 가능성이 크다. 의미가 부여된 날이다. 그런 시간조차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으로 인식했다간 낭패를 보기 일쑤다. 내가 보낸 10월의 시간들처럼 말이다.


나는 10월의 시간을 카이로스로 인식하지 못했기에 넘어졌다. 특별한 시간을 자연스럽게 흘려보냈기에 넘어졌다. 누구에게나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 그런 시간이 주어졌다는 건 기회가 생겼다는 의미고 특별한 일이 생길 거란 의미다. 잘 잡아야 한다. 더 좋은 곳으로 안내해 줄 시간 앞에서 뒤통수나 바라보는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하루의 시간을 벌어 남편의 생일은 잡을 수 있었지만 아이들의 생일은 놓치고 말았다. 만약 내년에도 넘어진다면 난 진짜 엄마가 아니고 이모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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