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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an 26. 2022

딸의 '사랑해'란 말에 눈물이

'사랑해'라는 말의 무게

'사랑해'란 말의 무게

같은 말이라도 그 말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무게는 달라진다. 아들이 입에 달고 사는 '사랑해요'란 말은 귀하고 고맙지만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가볍다. 반면 딸이 입에 담고 있는 '사랑해'라는 말은 중천금과 같아 받아들이기에 내 몸이 딸린다. 그 무게는 감당하기가 버거울 정도다. 그만큼 딸의 '사랑해'에는 무게가 있다.


그런데 그 무거운 말을 며칠 전에 듣고 말았다. 취중 딸의 옹알거림을 통해서였다. 침대에 누운 딸은 또르르 눈물을 굴리며 '엄마, 사랑해'라는 말을 남기고 잠이 들었다. 무슨 연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잠이 든 것이다. 너무도 귀한 말을 들어서인지 나 역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멍한 상태로 눈물을 흘려야 했다. 감격에 겨워 한참 동안이나 딸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한밤중에 꽃 꽂은 女ㄴ처럼 실실거리며 눈물을 훌쩍거렸다. 영화의 한 장면을 찍는 것마냥 감정을 한껏 끌어올려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하고선 뜨거워진 가슴을 조심스레 감싸 안고 방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는데...


2시간 후,

딸은 열연을 펼친 내 감동의 드라마를 호러물로 만들고 말았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조용히 잠들었으면 좋으련만 참을 수 없는 숙취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만 것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끝이 났다. 딸은 찬 바람을 일으키며 신관 사또를 찾아든 장화와 홍련의 모습을 하고 내 침대 맡으로 다가와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싸~했다. 소복을 입지는 않았지만 풀어헤친 머리가 섬뜩했다.

"뭐야! 왜?"

"집에 가야 해. 짐을 챙겨야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그래"

딸은 자꾸 짐을 챙긴다고 말하며 자기 방으로 갔다. 딸을 따라 방으로 간 나는,


오, 마이, 가뜨~악.

진동하는 음식물 비린내.

다행이라고 해야 하니? 침대와 이불은 멀쩡하구나.


단단해진 관계

딸은 설날 오지 못할 것 같다며 미리 집을 찾았더랬다. 집에 온 목적이 가족에 있지 않고 친구에 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집에 머문 내내 친구들을 만났다. 사건이 발생한 날은 집을 떠나기 하루 전으로 마지막 날의 아쉬움을 모두 다 풀어버리려는 듯 친구와 술까지 얼큰하게 마신 날이었다. 히죽거리며 들어오는 표정에서 기분을 짐작했다. 그런 히죽거림이 술 취한 사람 특유의 특성인지는 모르지만 어찌 되었건 기분이 좋았던 건 분명하다. 그런 딸이 아빠와 얘기를 하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삐걱거린 부녀 관계의 회복을 예측한 나는 반갑게 손을 이끌어 방으로 안내했다. 아빠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말에 지난 여름방학 때 집에 왔다가 남편과 서먹하게 헤어진 딸의 모습을 떠올리며 기꺼이 자리를 피해 주었다.


차를 마시고 티브이를 힐끔거리다 이쯤이면 이야기가 끝났겠지 싶어 방문을 열었는데 '아이고야, 이산가족이 따로 없구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감동의 도가니였다. 서로를 끌어안고 훌쩍거리고 있는 부녀라니.


"우리 딸이 많이 외로웠다네"

나를 보며 남편이 말했다. 이야기는 잘 마무리된 것 같았다. 남편은 딸의 말에 공감했고, 측은한 마음까지 갖고 있었다. 술이 고맙게 느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술의 기운이 아니고서야 딸이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긴장이 풀린 듯 축 처져 있는 딸을 일으켜 세워 씻게 한 후 침대에 눕히고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드라마를 찍었다. 남편과는 자식이란 존재에 대해 흐뭇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한데 그런 따뜻함 뒤에 섬뜩한 호러가 숨어 있을 줄이야.


굴곡이 없는 평범한 일상은 편안하고 안정된 삶을 주지만 깊이가 없다. 오히려 모난 정처럼 툭툭 튀어나온 사건들에서 희로애락 애오욕의 깊은 맛이 느껴진다. 딸이 가구며 바닥에 자신의 진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면 '사랑해'란 말은 천근의 무게로 목구멍 깊은 곳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 감히 입 밖으로 나올 엄두조차 못 내면서 말이다. 일상을 뒤집어 놓고서야 그 말은 세상 밖으로 나왔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더니 냄새나는 사건 하나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견고히 다져주었다. 쉽게 들을 수 없는 '사랑해'란 말을 끌어 주었다. 딸은 '왜 집에만 오면'이라고 속상해했지만 집이라서 괜찮은 것이었다.


딸의 '사랑해'를 받아 든 나는 더욱 묵직해져서 땅 위에 흔들림 없이 설 수 있는 부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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