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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un 23. 2020

딸 가진 엄마만이 받을 수 있는 선물을 아세요?

아이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2탄

딸이 택배를 보냈다.


퇴근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부엌으로 향했다. 먼저 온 남편은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탁을 닦으려는데 내 이름이 적힌 택배 상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남편에게 무엇이냐고 물으니 딸이 보낸 것 같다며 열어보라고 한다. 주소를 확인했지만 딸의 주소가 아니다. 딸에게 전화를 했다. 혹시 택배를 보내지 않았냐고 물으니 딸은 택배에 적힌 주소를 묻고는 자신이 보낸 것이 맞다며 엄마가 좋아할 선물이면 좋겠다고 한다. 선물이라는 말에 '고마워, 딸'이란 말을 남기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선물을 확인하고픈 마음이 딸과의 대화보다 컸나 보다.


선물이 싫을 이유는 없다. 거기다 싹싹하지 않은 딸이 보낸 선물이면 더욱 그렇다. 그게 무엇이 됐건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박스를 붙들고 있는 투명 테이프 뜯어냈다. 칼로 깔끔하게 잘라낼 수도 있었지만 급한 맘에 옆구리에서 한쪽 끝을 떼어낸 후 시원스럽게 뜯어버렸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설레는 맘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웃음 사이로 새어 나오는 노래는 내 의식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소리였다. 택배 상자가 입을 벌렸고 선물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상자는 자신의 존재를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완경 박스? 설마... 안경 박스가 잘못 표기? 넌 대체 정체가 뭐니?

안에 든 물건을 하나씩 꺼내보았다. 물건들은 자신을 설명하는 카드를 하나씩 품고 있었다. 그리고 선물의 정체를 밝혀주었다. 이 선물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글을 읽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조금 전까지 싱글벙글 입으로 노래를 흘렸는데 어느새 노래는 눈물로 흐르고 있었다.


남편이 놀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난 "ㅁㅈ의 마음이 고마워서"란 말만 남겼다. 정말이었다. 고마웠다. 엄마에게 무심한 딸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딸은 나의 말 한마디도 헛투루 듣지 않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선물의 첫 번째 카드가 말해주고 있었다. '처음 겪는 갱년기가 낯선 엄마를 위한 선물'이라고.


아직은 나 자신이 갱년기인지는 모르겠다. 해서 갱년기 증상이 어떤 건지도 설명할 수가 없다.


얼마 전 딸의 집을 방문해 생필품을 사주면서 불규칙해진 월경 때문에 엄마는 생리대도 필요 없게 생겼다며 '이제 엄마도 갱년기라 되려나 보다'란 말을 했었다. 그런데 딸은 그 말을 그냥 흘리지 않고 가슴에 새겨 저런 선물을 보낸 것이다.

딸이 직접 쓴 것은 아니지만 카드에는 딸의 마음을 대신한 글들이 적혀 있었다. 목련 모양의 브로치에는 '목련의 꽃말은 고귀함이래요. 어디서나 더욱 가치 있는 순간으로 만들어줄 거예요. 엄마를 아끼는 제 마음을 항상 지니고 다녀주세요'라는 말이, 거품 족욕제에는 '늦은 밤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어요. 지친 하루를 보낸 엄마는 휴식을 누릴 자격이 있어요. 곤히 잠든 엄마가 행복한 꿈을 꾸었으면 해요'


이런 식으로 4개의 선물이 각각의 카드를 품고 들어 있었다. 완경은 '월경이 완성되었다'는 의미로 '폐경'을 긍정적으로 순화한 표현이라고 한다. 솔직히 말해 이 선물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난 이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의미를 알고 나니 이 선물은 엄마로서의 일을 성실히 수행한 대가로 딸이 선사한 훈장같아 마음이 뭉클해졌다.


마음속에 담긴 말


딸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인색한 아이다. 고마움도 잘 표현하지 않는다. 그런 딸이 나에게 숨기지 않는 감정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노(怒), 화내는 일이다. 어느 땐가 '넌 엄마에게 화내는 일밖에 할 줄 모르냐'며 야단을 친 적이 있었다. 그때 딸이 그랬다. 자신이 화가 날 때 엄마에게 화를 내지 않으면 누구에게 화를 내냐고... 자신의 투정을, 화를 받아줄 사람은 세상에는 엄마밖에 없다 여긴 것이다. 그건 분명 나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럼에도 난 고맙다는 말이나 사랑한다는 말을 더 갈망했다.


그런 딸이 자신의 마음속에 담긴 말을 나에게 보냈다. 늘 감사하고 고마워한다는 자신의 마음을.


살가운 아들이라도 하지 못할 선물이 저런 것이다. 다달이 같은 고통을 공유한 딸만이 할 수 있는 선물, 평생에 단 한 번 받을 수 있는 선물. 딸 가진 엄마만이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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