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빛구슬 Oct 18. 2019

어머니, 번지수가 틀렸어요.

어머니, 효자 아들만 보지 마시고, 며느리도 봐 주세요.

"띵동"

회식이 있다던 남편이다.

늦을 줄 알았는데 웬일로 일찍 들어왔다. 대견한 마음에 문을 열었는데 걸어 들어오는 폼이 이상하다. 이 시간에 저 정도의 걸음걸이면 술을 마신 게 아니라 들이부은 것이다.


남편은 들어서자마자 어머니를 안았다.

"아, 우리 어머니. 불쌍한 우리 어머니. 오늘 제가 좀 마셨습니다"

"아이고, 몸 생각해서 조금만 마시지 왜 이렇게 마셨어? 그리고 이런 아들이 있는데 엄마가 왜 불쌍해? 엄마 걱정 말고 피곤한데 얼른 가서 씻고 자"

남편을 어머니에게서 떼어내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정신 좀 차리세요. 어머니가 그리 좋으면 어머니랑 주무시던가. 저는 술 취한 남편 하나도 안 반갑습니다"

내 말이 언짢으셨는지 어머니께선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가라고 해서 실실거리는 남편을 부축해서 방으로 왔다.


술이 이렇게 취했을 때는 샤워를 하러 들어가도 불안하다. 가끔 제대로 서지도 못해 쿵쿵 넘어지는 경우를 봤기 때문이다.

다행히 남편은 아무 일 없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그러곤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앉으며 두 손을 다정히 잡았다.

"ㅇㅇ엄마, 나 오늘 기분이 너~무 좋네. 근데 진짜 오늘 어머니랑 자도 될까? 어머니랑 한 번은 자고 싶었는데 자고 나면 그게 마지막이 될까 봐 못 잤는데... 오늘은 자고 싶네. 응?"


남편은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홀로 주무시는 어머님과 한 번은 자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의무 같은 그 일을 하고 나면 어머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할까 봐 더 나이 드실 때까지 그 일을 유예시키고 있었다.

"그래요, 자요. 자고 와. 어머님도 본인 아들 술주정 좀 겪어봐야죠"

젊을 때라면 남편의 말과 행동이 어색하고 서운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니 그런 모든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졌다. 

아니 술 냄새 풍기는 남편이 어머니께로 간다니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했다.

남편은 베개를 안고 어머니 방으로 갔다.


다행스럽게도 어머니 방에는 침대가 두 개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머니께선 손님이라도 오시면 자고 갈 수 있게 침대는 치우지 말자고 하셔서 아버님 침대가 남아 있다.


그날 난 모처럼 대자로 팔다리 쭉 뻗고 잤다. 그런데 새벽에 남편이 왔다.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시간인데 자다가 온 모양이다.

자리를 옮겨 누울 자리를 마련해 주었는데도 눕지 않고 침대 끝에 앉아 있더니 갑자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나 무슨 일이지 물었다.

남편은 양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어머니의 팔뚝을 만졌는데 팔에 살이 하나도 없어. 흐~. 뼈만 만져진다고... 어머니가 너무 늙으셨어"

나는 나이 드신 분들이 다 그렇지 않냐고, 그래도 어머님은 다른 분보다 건강하신 거라고 달래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울 어머니를 마른 분으로 생각하실 것이다. 그러나 어머님은 평생소원이 어버님께 업혀보는 것일 만큼 체격이 좋으신 분이시다. 그런데 나이 드시면서 이상하게 팔다리만 살이 빠지셨다.

그런 어머님이 남편은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난 남편을 진정시키고 잠을 더 잤다.


다음날, 남편이 출근한 뒤 어머니께선 굳은 얼굴로 날 부르셨다.

"애미야, 네가 서운할지 모르지만 이 말은 하고 넘어가야겠다. 어젯밤에 난 한숨을 못 잤다. 휴~. 말을 하려니 심장이 떨린다."

정말로 어머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눈시울도 붉어지고 있었다.

"어머니,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너 어떻게 니 남편을 쫓아낼 수가 있냐? 내가 정말... 나중에 내가 죽더라도 그런 일은 하지 마라"

말문이 막혔다. 심장이 대책 없이 두근거렸다. 눈물까지 났다.

"어머니,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ㅇㅇ아빠를 쫓아냈다니요? 제가 ㅇㅇ아빠를 쫓아낸 것이 아니라, ㅇㅇ아빠가 저를 버리고 어머니에게로 간 거라고요. 지금 이 상황에서 화가 나야 할 사람은 전데 왜 어머님이 화를 내세요?"

"그래... 미안하다. 그럼 내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난 네가 네 남편을 쫓아낸 줄 알고 얼마나 놀랬는지 나 죽더라도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된다."

어머님께서 사과하셨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난 애써 웃으며

"어머니께선 ㅇㅇ아빠를 50년 넘게 봐 오시면서 아직도 ㅇㅇ아빠를 모르세요. ㅇㅇ아빠는 절대 저에게 쫓겨나거나 할 사람이 아니에요. 저를 쫓아냈으면 몰라도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괜한 걱정을 하셨네요"


어머님과 얘기를 끝내고 방으로 왔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억울했다.

20년을 살면서 나는 내 남편의 성격을 다 파악했다. 그런데 50년을 넘게 산 어머님은 남편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하셨단 말인가? 아니면 행여라도 생길지 모르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까?


어머니, 번지수가 틀렸습니다. 제가 쫓아낸 게 아니라 ㅇㅇ아빠가 절 버리고 어머니을 찾아간 것이고요. 이 일로 억울하고 화가 나야 할 사람 또한 어머님이 아니라 저라고요. 제발 효자 아들만 보지 마시고 며느리도 좀 봐 주세요. ㅇㅇ아빠는 고지식하고 자존심이 강해서 부인한테 당할 사람이 절대 아니니 아무 걱정 마세요.


오해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난 이 일로 남편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는 남편의 사랑, 남편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사랑

둘의 사랑 사이에서 나는 서럽다.




작가의 이전글 내가 남편과 재혼을 했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