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흔들려 글이 흔들렸다. 고장난 레이더마냥 방향을 잡지 못해 흔들렸다. '써야지'란 말이 악마의 속삭임처럼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글로 안착하진 못했다. 모니터 앞에서 떠다니는 글을 잡으려 애쓰다 멍청이가 되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일상이 불안하여 쓰지 않았는데 어찌 된 일인지 쓰지 않음이 일상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며칠 동안 스스로 만든 분노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몇 줄기의 태양빛으로도 사그라들 안개였는데 그 속에서 볼썽사납게 허우적거리며 그것을 걷어내겠다고 발악을 했다. 누가 봤을까 두렵다. 사는 게 이렇다. 어리석은 행동인 줄 알면서도 행하게 된다. 그렇게 행동함이 고매한 인격을 보장해주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행동해야만 고매해질 줄 안다. 우매한 판단이다.
지난 글에서 갈등의 대상을 밝히지 않은 건 순전히 오기였다. 그건 마치 누군가와 관련된 글은 절대 쓰지 않겠어 라는 악다구니와 같았다. 오만한 행동이었다는 걸 지금은 안다. 생각만 해도 헛웃음이 나는 치졸함이다. 그까짓 게 뭐라고 그 일에 그리 목을 맸을까? 난 결백하니 어떻게든 증명을 해야 했던 걸까? 그래야만 당당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한 여자가 될 수 있다 생각한 걸까? 나의 행동은 참으로 유치했다. 해야 할 일이었지만 가족이기에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파도가 몰아친 후 숨 막히게 고요해진 바다를 우리 집이 삼켰다. 문제는 해결되었다. 더 정확히 말해 그냥 흘려보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나는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려 어머니와 대화를 시도했고 거기서 '잘못 들은 것 같다'는 애매한 답을 얻어냈다. 꼬치꼬치 캐물어 발본색원하려 했던 마음은 은연중에 듣게 된 말 한마디에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어머니의 말은 강했다. 그 말은 낮고 힘이 없어 방바닥을 기어 겨우 내 몸을 올라탔지만 나를 무력화시키기엔 충분했다. 순식간에 피해자라 자처한 나는 가해자가 되었다.
"늙. 고, 외.로. 운 것도 서러운데 그만 하자"
'외롭다'고 했다. 사는 동안 저 말은 나만 쓸 수 있는 언어라 생각했다. 우리 집에서 외롭고 고독해질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 여겼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외롭다는 말을 하셨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누리는 사람이었고 여유와 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힘의 논리로 서열을 정했다면 어머니는 일등 나는 꼴등이었다. 나는 약자고 어머니는 늘 강자였다. 그런데 그 관계가 우습게 꼬였다. 약자인 내가 강자인 시어머니를 다그치는 꼴이 되었다.
나이가 들면 예외 없이 아픔을 이야기한다. 다리가 아프다느니 허리가 아프다느니 하면서. 그 말이 나이듦을 대표하는 레퍼토리처럼 들렸기에 진심으로 아프거나 고통스러워 하는 말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 허리가 아프고 다리도 아픈 것이었다. 어떠한 외부 조건이 갖추어진다 해도 세월 앞에서는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께도 세월은 가까이 있었다.
어머니의 외롭다는 말에 결혼 초 내가 느꼈던 외로움이 오버랩되면서 나의 진실게임은 끝이 났다. 가족이란 이름 안에 있으면서도 외로웠던, 다른 가족들의 웃음소리에서도 눈물이 핑돌았던 나의 모습이 어머니의 모습에서 나타나며 게임은 끝이 났다. 남편과 내가 웃고 있을 때, 아들과 내가 웃고 있을 때 어머니는 외로웠을 수 있다. 혼자 열외 됨을 느끼며 눈시울을 붉혔을 수 있다.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가족이란 이름의 이중성
가족이란 관계는 참으로 묘하다. 같이 있어 든든한 울타리가 되는 듯하다가도 그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 너무 가까워서, 너무 많이 알아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버려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려서 상처를 주고받는다. 한 울타리에 있으니 같이 웃을 것 같지만 누군가의 웃음 뒤에 우는 누군가가 있다. 모순되고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런 가족을 선택한다. 상처 받고 눈물 흘리는 일이 있더라도 그 안에 있고자 한다.
사소한 일에나 분개하는 모자란 삶을 살고 있어 여권신장이니 양성평등이니 하는 대의명분이 나의 결혼 생활엔 없다. 구시대 유물인 시집살이를 부여잡고 사는 나를 보며 누군가는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른다. 그럼 어떤가 천편일률적으로 야무진 사람들 틈에 나처럼 모자란 사람이 한 명 정도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런 나의 모자람이 누군가에게 다행스런 위로로 작용한다면 그건 그들의 복이다. 그들이 복된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