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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Sep 02. 2021

방앗간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추를 빻았다

고추를 빻았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고춧가루를 샀다. 결혼 생활 20년 중 처음 있는 일이다. 보통은 가을에 고추를 빻으면 이듬해 고추를 빻을 때까지 먹곤 했다. 그런 고춧가루가 올해는 빻을 시기가 되기도 전에 떨어졌다. 코로나로 집에서 음식을 너무 많이 만들어 먹었나 의심을 하며 사서 먹으면 안 될 것으로 여긴 고춧가루를 샀다.


음식을 만드는 데는 많은 양념이 필요하지만 우리 집에선 그중 으뜸이 고춧가루였다. 김치를 담글 때도, 찌개를 끓일 때도, 심지어 라면을 먹을 때도 고춧가루를 넣었다. 짜장 라면뿐 아니라 매운 라면에도 넣었다. 알게 모르게 사용했던 양념인지라 필요성을 느낄 겨를 조차 없었는데 고춧가루가 떨어지고 보니 모든 음식에 고춧가루를 넣어야 할 것 같은 절실함이 느껴졌다. 임시방편으로 고춧가루를 사긴 했지만 하루빨리 고춧가루를 빻아야 했다.


평소에는 고추를 추석을 지내고 빻았다. 무슨 신성한 의식이라도 치르듯 청명한 날씨에 바람이 선뜩거릴 때를 기다린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그때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될 수 있는 한 그 시기는 앞당겨져야 했다. 아는 분에게 고추를 예약하고 날 좋은 주말을 기다렸다.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가을장마가 시작되었는지 주말마다 비가 내렸다. 그저 마음을 비우고 비 내리지 않는 주말을 염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가 왔다. 지난 토요일이다. 잠시 비가 그치고 햇빛이 들었다. 토요일 오전 한 타임의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니 행동 빠른 남편이 고추를 가져와 어머니와 마당에서 다듬고 있었다. 나는 옷을 벗기가 무섭게 고추 앞으로 달려들었다. 면 장갑을 끼고 가위를 들었다. 깨끗하게 말린 고추였지만 장갑으로 한번 닦아내고 가위로 꼬투리를 잘랐다. 매콤한 향이 마스크를 뚫고 들어와 연신 기침을 해댔다. 청양고추를 따로 사지 않아 조금 매운 고추로 구입했더니 그 기세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매운 향을 견디며 저린 다리를 폈다 구부렸다 난리를 치고, 허리를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어가며 20근의 고추를 손질했다. 손질된 고추는 커다란 돗자리 위에서 일광욕을 시켰다. 고추가 마르는 동안 점심을 먹고 바삭하게 마른 고추를 담아 방앗간으로 출발했다.


방앗간에 도착한 후 늘어선 줄에 놀랐다. 우리 집 고추 보따리만 한 보따리들이 앞으로 앞으로 나란히를 하며 줄지어 있었다. 다른 때 같으며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섰겠지만 내 코가 석자인지라 하는 수 없이 꼬랑지에 우리 고추 보따리를 붙였다. 그런데 우리 고추 보따리가 꼬리에 붙기 무섭게 다른 분이 오셔서 우리 보따리에 자신의 고추 보따리를 붙였다. 늘어나는 고추 보따리를 보다 못한 방앗간 집 사장님이 다음에 고추를 가져오신 분이 계시면 버스가 떠났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하시곤 가게 안으로 들어가셨다. 사장님도 토요일은 일찍 퇴근하고 싶으셨던 거다.


기다리는 동안 고추 보따리들이 하나씩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 기다렸지만 지루함과 더위는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나는 덥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곳에 계신 분들 때문이었다. 그곳에 계신 분들은 모두가 어머니 또래의 나이 드신 분들이었다. 젊은 사람이라곤 남편과 나 둘 뿐이었다. 그분들은 20근 30근이나 되는 고추를 빻기 위해 홀로 자리를 지키고 계셨다. 그중에는 남편 되는 분이 고추를 실어다 주신 분도 계셨지만 혼자서 철로 된 카트기에 고추를 싣고 오신 분도 계셨다. 그분들이 고추를 대하는 태도는 진지했다. 자신의 고추가 아닌 남의 고추도 잘 말랐는지 확인해 주시고, 고추가 잘 빻아지고 있는지 가게를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고춧가루에 정성을 보였다.


허리가 굽어 키가 작아진 어떤 분이 빻은 고춧가루를 카트기에 칭칭 동여매고는 두 손을 뒤로 빼 카트기 손잡이를 끌고 가시는 모습을 봤다. 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못해 경건하기까지 했다. 그분이 싣고 가는 고춧가루에 자식에 대한 사랑이 쫄랑쫄랑 따라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감출 수 없는 사랑의 모습이었다.


그날 방앗간에서 뵀던 분들은 모두 우리 앞 세대 분들이었다. 고춧가루가 빻아지길 기다리는 동안 나보다 젊은 사람은커녕 내 또래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만약 그 자리를 지켰던 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나면 그 자리를 지킬 사람들이 있기나 할까. 불가능하리라 본다. 지금 자리에 없는 사람들이 빈자리를 메우겠다며 찾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니 말이다. 그때쯤에는 이갈이 하는 아이의 빠진 이처럼 방앗간의 자리는 구멍이 날 것이고 우리 주변에서 방앗간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조차 힘들 것이다. 그때 난 어디에서 고추 방아를 찧어야 하지? 서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사물이 가진 가치나 유용성을 떠나 사라지는 모든 것에는 서러움이 묻어 있다.


떨어진 고춧가루를 빻으러 방앗간을 다녀온 후 난데없이 방앗간의 미래를 생각했다. 바라건대 나의 생각이 기우가 되어 지금 남아 있는 방앗간들이 추억처럼 우리 곁에 방울방울 살아남았으면 좋겠다.

 

믿을 만한 곳에서 산다고 샀지만 햇 고춧가루에 미치지는 못한다. 색깔 면에서도 입자 면에서도 오른쪽 햇 고춧가루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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