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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an 20. 2022

색까지 예쁜 나의 동치미

겨울에 생각나는 시원한 국물

맛은 아는 맛, 색은 예측불가.


김장을 하기 전 늘 하는 일 중 하나가 동치미를 담는 일이었는데 그 일을 걸렀다. 삶이 바빠서였는지 그저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때를 놓쳤다는 게 억지춘향으로 지어낸 변명이라면 변명이라 하겠다.


동치미는 김장 김치가 이도 저도 아닌 맛으로 미쳐갈 때 특유의 시원함으로 몽롱해진 머리를 강하게 내리치는 힘이 있다. 머리뿐 아니라 속까지 깔끔하게 씻어준다. 한약도 아닌 것이 두 손을 공손히 모아 대접을 들이키게 하는 마법도 부린다. 수저로 국물을 떠먹는 건 동치미를 먹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어머니께 배운 동치미는 내가 담는 동치미와는 방식이 달랐다. 어머니의 동치미는 김장 못지않은 일거리를 만들었다. 그 일은 11월 중순경 2~3단 정도의 몽땅한 동치미 무를 사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동치미 무는 하얀 무와 새파란 잎이 각자의 쓰임을 다한다. 무는 동치미의 재료가 되고, 잎은 시래기의 재료가 되었으니. 시래기는 하얀 무 위에 머리카락처럼 덥수룩하게 붙은 잎을 떼어내 찜솥에서 삶아내면 된다. 삶아진 시래기를 씻은 뒤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비닐 팩에 담아 물을 자작하게 붓고 소분하여 냉동고에 얼리면 겨우내 보글보글 끓여 먹는 우거지 된장국의 재료가 된다.


동치미의 재료가 되는 하얀 무는 깨끗이 씻어 물기를 뺀 후 천일염에 돌돌돌 굴린다. 소금 옷을 입은 무를 커다란 항아리에 차곡차곡 쌓아 뚜껑을 닫고 일주일 정도 묵히면 1차 작업은 완성이다. 일주일이 지나 뚜껑을 열어 보면 소금기에 힘을 잃은 무가 다소곳이 앉아 있는 걸 보게 된다. 이때 물을 부어 주어야 하는데 간은 취향 껏이지만 양이 많은 경우는 소금 간을 세게 하는 것이 좋다. 우리 집에서는 동치미 한 동이를 3월 초까지 먹기에 소금물을 강하게 하는 편이었다. 그래야 하얗게 피어나는 골마지를 막을 수 있다. 물을 붓고 통마늘 한 줌, 허리를 부러뜨린 청양고추 열 개정도, 생강 2~3톨과 사등분한 배 한 개를 넣고 마지막으로 뿌리를 제거한 길쭉한 대파를 씻어내어 재료를 덮어주면 2차 작업까지 완성이다. 이것이 내가 어머니께 배운 동치미 담는 법이다.


하지만 이번 동치미는 어머니의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때를 놓쳤기 때문이다. 통무를 사용하지 않고 무를 싹둑싹둑 잘라버리면 빠른 시간에 동치미를 담을 수 있다. 빠르게 먹을 수도 있다. 많은 양이 아니더라도 동치미 특유의 알싸하고 시원한 맛까지 즐길 수 있으니 효율적인 방법이라 하겠다. 무는 정사각형보다 직사각형으로 써는 게 동치미답다. 깍두기가 정사각형이라면 동치미는 직사각형이다. 직사각형으로 썬 무를 앞 뒤로 뒤집어가며 소금 간을 해서 2시간 정도 두었다가 물로 살짝 헹궈내 작은 항아리나 플라스틱 통에 담으면 90%는 완성이다. 그 위에 마늘이나 청양고추, 생강을 넣고 대파나 쪽파로 재료를 덮어 간을 한 물을 부어주면 끝이다. 곧 먹을 것이니 간은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도 무방하다. 아파트 베란다라면 2주 후면 맛이 들것이고, 우리 집처럼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뒷마당에 놓는 경우는 3주 이상은 두어야 적당하다. 한 달이 되니 동치미 맛이 제법 느껴진다.

마당에 놓인 항아리를 들여왔다.
자색 무를 넣었더니 연한 핑크빛이 돌았다. 붉은빛을 내겠다며 비트를 넣었다간 핏빛에 깜놀할 것이니 비트로는 동치미를 담지 말기를.
겨울에는 뜨끈한 국물? 시원한 국물도 있어.
자색무 덕에 핑크빛이 도는 동치미. 하얀 동치미를 원하면 자색무를 빼면 된다


겨울에는 뜨끈한 국물이 진리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다. 하지만 살얼음이 얇게 낀 동치미 국물을 툭 깨어내어 그 쨍한 맛을 드링킹하는 것 또한 겨울에나 느낄 수 있는 진실의 맛이다.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이 쩌릿한 아찔함에 '동치미는 역시 겨울이야'를 연발하게 하는 묘미는 뜨거움이 아닌 차가움에서 나온다. 겨울의 맛은 뜨끈한 국물에서 우러나지만 시원한 동치미에도 깃들어 있다. 


기름진 음식을 먹었다면 동치미를, 화가 나서 얼굴이 화끈거린다면 동치미를, 치맥을 좋아하는 당신이라면 간단하게 담을 수 있는 동치미를 만들어 시원스럽게 들이키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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