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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ul 30. 2022

시어빠진 갓김치에 감사

여름이라 더 좋은 맛

음식 취향이 달라 좋은 점


지난 주말 남편이 여행을 다녀왔다. 직장 동료의 초대를 받아서였다. 동료의 집(별장이라고 해야 하나)은 바다가 보이는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취미인 낚시를 즐기기 위해서 마련한 곳이라 한다. 퇴직 후를 생각한 모양인데 솔직히 그분의 경제력이 부러웠다. 취미 생활을 위해 집 한 채 정도는 거뜬히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이라니. 그분은 동료들에게 힐링의 장소를 제공하고 집도 구경시킬 겸 초대를 했던 것이다.


처음 남편이 여행을 떠난다는 말을 했을 때 차오른 짜증은 어쩔 수 없었다. 주말이면 집에서 해야 할 일도 많고,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인데 남편만 떠나나 싶었던 것이다.


이런 나의 언짢음과는 달리 어머니께서는 남편의 외출을 무척이나 반기셨다. 그동안 일하느라 고생했으니 집안일은 다 잊고 편히 쉬고 오라는 말씀을 하셨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늘 그런 식이다. 같이 일을 해도 내가 하는 일은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남편이 하는 일은 안쓰러운 일이라 생각하신다. 물론 어머니 입장에선 내가 하는 일이 남편이 하는 일보다 수월해 보여서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다. 그렇다고 쉼에 대한 욕망마저 적은 건 아닌데 그걸 모르시는 것 같아 서운했다.


하지만 언짢은 마음은 이내 풀어졌다. 뒤이어 찾아온 자유 때문이었다. 남편이 떠난 후 독차지하게 된 침대는 넓었고, 마음대로 누를 수 있는 채널 독점권은 황홀했다. 아들에게서 술꾼이란 말을 들으며 마시는 맥주 또한 달달했다. 비록 주말마다 즐기는 드라이브의 여유는 사라졌지만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거래란 생각에 웃음이 났다. 집을 벗어나 느끼는 자유도, 집에 머무르며 느끼는 자유도 마음만 안락하다면 어디에서든 가볍고 설렐 수 있는 일이다.


다음날 집에서 벗어난 자유를 만끽했을 남편이 갓김치 한 박스를 손에 들고 유유히 돌아왔다. 다른 때 같으면 좋아했을 그 김치를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받아 들었다. 집에는 이제 막 주문해서 먹고 있는 갓김치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였다. 다른 것을 사 오지 그랬냐는 추궁에 남편은 사주는 것을 들고 왔을 뿐이라 했다. 반가움에 받아 든 김치가 아니라도 통에는 담아 둬야 할 것 같아 비닐을 벗기는데 색이 좀 이상했다. 푸른기가 전혀 없는 우중충한 갈색에, 그런 색의 김치가 내는 특유의 쿰쿰함. 이게 뭐지 싶어 남편도 나도 어머니도 눈이 동그래졌다. 익은 김치가 분명했다. 익어도 한참 익은. 묵은지... 작년 김장 때 담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색이었다.


남편은 묵은지인 줄 알았으면 들고 오지 않았을 거라며 자신의 음식 취향을 피력했다. 익은 김치는 남편의 적이다. 곰탕이나 설렁탕에 어울리는 익은 깍두기조차 싫어하는 사람이 남편이다. 나 역시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 그것이다. 갓김치가 특산물이라는 지역에서 사 온 김치라면 적어도 방금 막 담은 김치 정도는 선물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미 고개를 돌려버린 남편을 뒤로하고 그래도 맛은 봐야지 싶어 가위를 들고 와 단단해 보이는 대 부분을 잘라 맛을 보았다. 눈이 찡그려지는 시큼함에 입에 착착 감기는 감칠맛. 불현듯 물에 만 밥 한 숟갈이 떠올랐다.


'그래, 이 맛이야.'

내 취향이었다.



음식 취향이 다르면 이런 좋은 점이 있다. 본인의 취향이 아닌 음식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아 그 음식을 독차지 할 수 있다는 점. 시어빠진 갓김치는 게미진 음식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자꾸자꾸 먹고 싶어 머릿속에서 빙빙 도는 그런 음식.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든든해서 반찬 걱정을 잊게 만든 음식.


시어빠진 갓김치는 더운 여름날 밥을 시원한 물에 말아먹을 때도, 누룽지를 먹을 때도, 뜨끈한 감자된장국을 먹을 때도 맛있었다. 그렇게 시어빠진 갓김치는 매 식사 자리를 나와 함께 했다. 그랬더니 김치는 어느새 바닥이 나고 말았다. 허전함 마음이 밀려왔다. 더 주문을 하고 싶어 주소를 찾았지만 없었다. 받아 들 때 관심조차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남편에게 당부를 했다. 직장 동료에게 부탁해서 그 반찬 가게 주소를 꼭 알아오라고.


사람이든 음식이든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시어빠진 갓김치를 바라보기만 하고 먹어보지 않았다면 그 게미진 맛을 어찌 알았겠는가. 천덕꾸러기가 될 뻔한 갓김치는 내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날카로운 활이 되어 꽂혔다.


*'게미지다'는 전라도 방언으로 '겉 맛이 아니라 속 맛, 한번 좋았다가 마는 게 아니라 먹으면 먹을수록 자꾸 당기고 그리워지는 맛'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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