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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Aug 16. 2022

말에 베이다

말에 베이다

남편과 나,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었지만 말해서는 안 되는, 입만 다물면 자연스레 해결될 수 있는 일에 쓸데없이 입을 나불거려 단절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입 밖으로 나오려는 힐난을 잘근잘근 씹어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삼키며 참아냈다.


그날 들었던 말. 싸늘하고 선뜩했다.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왜? 왜,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니. 그게 나만의 사랑법이란 걸 왜 알아채지 못하니.'


며칠 동안 희석되지 않은 말들을 녹여내느라 마음은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었다. 겨우 진정을 하고 딸과 통화를 했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 진지했던 마음이 어이없이 무너지는 걸 느껴야 했다. 밀봉되었던 마음이 염치도 모르고 문을 연 것이다. 


'아! 또다시 이대로 무너지는가?' 

'그럼 어떻게 해. 그렇다고 애써 참았던 걸 이제야 들춰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순 없잖아. 자식에게 꿍해봐야 도움 될 게 뭐가 있어. 그냥 잊어. 그냥 잊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 결국 관계를 삐걱이게 만든 것 역시 자식을 위한 마음이었잖아. 이것 역시 자식을 위한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여.' 

그날도 마음을 점령하려는 선과 악의 다툼은 계속되었다. 옳은 선택을 위한 다툼에 주름은 늘었고 머리카락은 줄었다. 


여름휴가 전, 딸과 보낼 생각으로 마음이 설렜었다. 함께 호캉스를 즐기자며 호호거리기까지 했으니까. 딸이 휴가를 보내기로 한 날 약속이 있었던 걸 깜박했다며 호캉스가 취소되었을 때도 이해를 했다. 날짜를 착각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런데 선심 쓰듯 내려와 남기고 간 말 한마디에는 어떤 이해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게 기대에 부풀었던 엄마에 대한 보답인가 싶어 화가 치밀었다.


어찌 보면 그날 들었던 말은 누군가에겐 아무렇지도 않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억양의 차이만 배제한다면 자랑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과거 전적이 있는 나에겐 달랐다. 그 말은 나를 비꼬는 말이었고, 나에 대한 반항이었으며, 나를 거부하겠다는 뜻이었다. 난 그렇게 해석했다. 

 

'난 내가 무슨 셀럽이라도 된 줄 알았어'


이 말이 그렇게 아팠던 건 억양이 주는 미묘한 차이와 그 말이 내 전화에 대한 답이라는 데 있었다. 난 딸이 늦게 들어왔을 때 전화로 딸을 질리게 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다. 해서 이번엔 행동을 자제했다. 그저 딸이 들어오는 시간이나 체크할까 싶어 전화를 했고 답이 없자 몇 통을 더 했을 뿐이다. 그런데 시간이 늦어지면서 단편소설 같았던 걱정이 장편소설이 되었고 그와 비례하면서 전화 내역도 쌓였다.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던 딸은 인내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야 전화를 걸어 데리러 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곤 차에 타자마자 저런 말을 했다. 


'뭐라고?' 속 좁게 의문이 일었다. 도대체 이 아이에게 부모란 어떤 존재일까? 부모는 그저 경제적 지원이나 하는 허상이고 실질적 존재는 친구밖에 없단 말인가?


아팠어? 나도 아팠어.

"여기서는 그렇게 마시지 않아. 집에 가서는 편하니까 마신다고 했잖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솔직히 너 그날 일 잘 기억나지 않지? 세상에 좋은 사람만 있으면 네가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엄만 걱정하지 않아. 밤을 새도 상관없어. 하지만 소수의 사람이 두려워서 그러는 거야. 나쁜 의도를 가진 소수의 사람이."

"나도 그 정도는 알아. 그러니까 그만해. 자꾸 그런 말을 하면 나를 믿지 못해 그런 줄 알고 진짜 화낸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밥 잘 챙겨 먹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해. 아니 무슨 일이 없어도 전화 좀 하고"

"어~ 알았어"


이상하다. 난 딸을 좋아하는데도 딸과는 거리를 유지할 때가 더 편하다. 얼굴을 보고 말을 하면 주고받는 말이 자꾸만 꼬인다. 내 걱정의 말을 딸이 비틀어서 듣는 것도 화가 난다. 부모가 된다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인가를 자식을 낳고 깨달았다. 자식이 성인이 되면 놓아주어야 할 끈이 있는데 그것을 놓지 못해 그런 것인가 의문도 든다. 특별한 관심이 특별한 부모를 만드는 것도, 그렇다고 특별한 부모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닌데 나는 왜 그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일까? 자식이 행복하면 족하다고 하면서 왜 그 행복을 갉아먹는 말만 하는 것인가. 


몇 주 전 들었던 강연 하나가 떠오른다. 자연을 읊다 스스로 자연이 되어버린 시인 도연명에 대한 강연이었다. 나에게 도연명은 '귀거래사'로도 '도화원기'로도 기억되는 시인이 아니다. 그저 자식을 뜻대로 키우지 못해 걱정이 많았던 부모에 불과했다. 그런데 강사분의 말을 듣고 부모인 도연명이 아니라 그의 자식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쌀 다섯 말에 허리를 숙일 수 없다며 관직을 그만두고 자연에 묻혀 시를 지으며 살았던 아버지를 둔 도연명의 자식들. 그들은 그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을까? 도인과 같은 모습으로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 자식을 한탄하며 시를 지은 아버지가 몇 천년 후에는 최고의 시인이 될 거라며 자랑스러워했을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도연명만 힘들었던 게 아니라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한탄한 아버지를 둔 자식들도 힘들었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내가 힘든 만큼 딸도 힘들었으리라 생각한다. 딸은 물리적으로 독립을 하면서 정서적으로도 독립을 했는데 나는 그러질 못했다. 독립한 딸을 마음으로 붙들고 있었다. 불화를 씨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딸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였던 거다. 씨는 언제든 싹을 틔울 수 있다. 움튼 싹이 자라기 전에 마음에 품은 씨부터 버려야 했다. 자식이 날 수 있게 가슴에서 털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시시때때로 자식의 일에 끼어들려는 마음으로부터 독립해야겠다.


이제는 지켜보는 것으로 나의 일을 대신하려 한다. 그들이 먼저 손을 내밀기 전에는 결코 그들 속으로 뛰어들지 않겠다 다짐한다. 대범한 척 독립 선언을 한다. 그런데 왜 자꾸 불안해지는가. 왜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가. 

아, 이 문제 많은 엄마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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