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를 떠오르게 한 음식.

고들빼기김치를 먹으며 시아버지를 떠올렸다.

by 은빛구슬

고들빼기김치를 담갔다. 김장을 하기 전 우리 집에서 담는 마지막 김치다. 이 김치를 다 먹을 때쯤이면 우리는 김장을 하게 되고 그 후 김장 김치를 먹게 된다.


고들빼기김치는 B급 김치다. 그나마 요즘엔 보편화되어 생소하지는 않지만 아직까진 메이저 김치판에 끼지 못하고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것도 아니니. 그 모양을 볼라치면 쭉정이처럼 삐죽 나온 잎 몇 가닥이 전부이며 뿌리 또한 인삼처럼 날씬한 몸매를 갖지 못한 채 씹으면 놀라자빠질 쓴 맛을 지닌 것이 이 김치의 정체다.


요즘은 재배를 해서 풍성한 잎을 가진 고들빼기도 많이 나오지만 우리 집에선 잎보다 뿌리를 선호하기에 튼실한 뿌리에 잎 몇 가닥이 붙은 천하의 못난이 고들빼기를 애써 구입해 김치를 담근다. 그러면서 고들빼기 뿌리를 씹을 때 느껴지는 오도독한 식감과 그 식감에서 나오는 달고 쌉싸름한 맛을 즐긴다.


우리가 이렇게 못생긴 고들빼기를 구입해서 김치를 담근 데에는 시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시아버지께서는 언제나 상품성이 있어 보이는 선명한 초록의 잎 좋은 고들빼기보다는 튼실한 뿌리에 잎이 약간 보랏빛이 도는 상품성에선 다소 뒤처진 듯한 고들빼기를 사서 김치를 담도록 하셨다. 그리고 그 고들빼기김치를 드시면서 고기보다 맛있다, 맛있다를 연발하셨다.


고들빼기김치를 먹으며 우리는 시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다 아는 얘긴데도 그 누군가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때면 그 사람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한다.

"이 고들빼기김치는 니 시아버지께서 참 좋아하셨는데..."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우리는 또 그 얘기를 한다.

아마도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나와 남편이

"이 고들빼기김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참 좋아하셨는데..."

하면서 또다시 그분들을 떠올릴 것이다.


고들빼기김치를 좋아하셨던 나의 시아버지. 그분은 참 고지식한 분이셨다. 조선시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셨기에 조선 시대 사람의 마인드를 버리지 못하신 것인지, 본래 그분의 성품이 그리하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으셨다면서도 생각에선 폐쇄성을 벗어나지 못하셨다. 심지어 돌아가실 때까지 그 성격엔 변함이 없으셨다.


아버님께선 자식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여기신 분이다. 우리가 부모님과 사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니 얼굴빛을 어둡게 하지 말고 효도하라고 하셨다.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를 자식들은 보고 배운다 말로 우리의 행동까지 제어하셨다.


솔직히 난 시어머니보다 시아버지와 사는 것이 더 불편했다. 직장 생활을 하기 전까지 아침, 점심, 저녁 식사 당번을 내가 맡았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나 집안 일 또한 내가 할 일이라 불만이 있어도 내색하지 못한 채 그 일들을 해야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점심 식사까지 챙기기는 힘들어졌다. 어머님께선 노래교실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오셔야 했고 점심 식사 당번은 어머님께서 맡게 되셨다. 아버님께선 그런 어머니께 미안해하셨고, 내가 직장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그 불편함을 못마땅해하셨다.


그러나 나에게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아이들과 집안 일에 치어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집순이로 살아가는 생활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다들 의미 있게 살고 있는 듯한 세상 속에서 나만이 잉여인간으로 남아 있는 거 같아 비참했다.


내가 일을 하는 동안에도 아버님은 내 일보단 어머님의 취미 생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다. 집안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날이면 나에게 집을 지키라 했고 어머님은 노래 교실을 가게 하셨다. 보통의 부모였다면 자식의 직장 생활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 텐데 아버님껜 그게 통하지 않았다. 아버님의 그런 행동은 나를 슬프게 했다. 십 년이 넘는 시간을 밥 차리고 집안일 하며 아버님을 위해 살았는데도 그 모든 게 소용없단 것을 아버님께서 손수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이후로 난 무슨 일이든 잘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했다. 그렇다고 세상이 나무라지 않았다.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너무 잘하려 노력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난 시어머니보다 시아버지의 시집살이를 더 겪으며 지냈다. 서운한 일도 시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다. 시아버지께 서운한 일이 참 많았던 것 같은데 그런 일들이 점점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그냥 이런 사소한 음식을 먹을 때나 떠오르는 것이 전부가 되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2년 만에 벌어진 일이니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기억이 지워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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