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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Jan 12. 2020

가정 폭력이 빚은 비극

<7년의 밤>을 이야기하다.

나는 소설가의 상상력을 존경한다.


그들이 만들어낸 상상력은 국가를 만들고, 문화를 만들고, 과학을 만든다. 보이지 않는 상상력 속에서 탄생한 역사는 미래가 된다. 인류의 발달이 상상력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유발 하라리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존재만으로 인류를 발전시키고 있다.


굴곡 하나 없는 거대한 힘, 앞을 치고 나가는 빠른 스피드, 깔끔하게 정돈된 마무리. 정유정의 소설 <7년의 밤>을 읽은 후의 나의 느낌이다.


작가는 세령 호라는 새로운 장소를 탄생시키고 그곳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책 표지의 호수를 한참 보고 있노라니 호수 가운데에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머리를 쑥 내밀 거 같은 섬뜩한 느낌이 든다. 대학 시절 읽은 문순태 작가의 <징소리>란 소설 때문이다.


<징소리>는 자신들의 고향이 수몰되면서 그곳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수몰 지역에서 사람들이 죽은 건 아니지만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영혼은 이미 그곳에 묻혔기에 그 수몰지역은 수몰민들의 무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책 표지의 호수 밑에는 아직도 자신들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 같고, 그곳의 사람들은 한 번씩 고개를 내밀어 세상 구경을 할 것만 같다.

책 표지의 호수를 가만~히 쳐다보라. 저 멀리서 고개를 내미는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가?



세령호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의 당사자인 최현수가 '미치광이 살인마'로 불리며 잡힌다. 살인자의 아들이 된 서원은 그날 자신의 아버지를 마음속에서 스스로 사형시켜 버린다. 그때 서원의 나이 12살.


살인자의 아들로 살아가는 서원의 삶은 결코 순탄할 수 없었다. 한 소녀의 목을 비틀어 살해하고, 그 소녀의 아버지는 몽치로 내리쳐 죽였으며, 자신의 아내까지 살해한 잔인무도한 살인마가 자신의 아버지인데 어찌 순탄한 삶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학교와 친척들로부터 버림받은 서원은 한때 자신의 집에서 룸메이트로 지낸 아저씨의 양아들이 되면서 비로소 숨을 쉬게 되고, 7년 전 밤에 있었던 사건의 실체도 파악하게 된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생각난 책이 한 권 있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기린의 날개>.


기린의 날개를 읽고도 만약을 가정했었다. 만약, 사건의 단초가 되었던 일을 숨기지 않고 말을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이 책을 덮고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만약 서원의 아버지가 비 오는 날 밤에 음주 상태로 운전했다는 사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차에 치인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갔다면 어찌 되었을까?


세령의 아버지 오영제의 복수는 딸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오영제는 근본적으로 소유에 대한 개념만 있지 사랑에 대한 개념은 없는 사람이었기에. 오영제에게 있어 아내나 딸은 소유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은 아니다. 그런 이유로 아내와 딸 역시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이런 사랑 없는 가정의 제왕인 오영제의 역린을 겁도 없이 건드린 것은 최서원이었다.


수목원으로 이사 온 첫날, 서원은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오영제에게 도발한다. 세상 무서울 거 없는 오영제의 가슴을 향해 거침없이 형체 없는 공을 날린 것이다.


서원의 당돌한 행동.

오영제는 별 볼 일 없는 인간, 최현수의 아들이 부러우면서 동시에 부셔버리고 싶어 진다.


7년 전 밤, 오영제의 딸 세령은 오영제의 폭력을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 비 오는 깜깜한 밤이었으나 아버지의 폭력은 어두운 밤보다 더 무서웠다. 세령의 나이 12살.


그리고 그날 밤, 도망치던 세령은 최현수의 차에 치고 만다. 최현수는 살아있는 세령이 '아빠'라 부르는 소리에 놀라 입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세령을 세령호에 던진다. 과거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던 아버지가 우물에 빠지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세령을 세령호에 빠뜨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라도  것처럼.


사실 오영제는 자신을 피해 도망친 아내 하영을 불러들일 미끼로 세령을 이용하려 했다. 그런데 최현수가 세령을 죽여버림으로써 자신의 계획은 어긋나 버린다. 세령이 도망친 날 밤, 세령을 찾던 자신의 차 말고 또 다른 차가 있었음을 발견한 오영제는 그 차의 주인을 찾게 되고, 형광 해골을 단서로 차의 주인이 최현수이고 그가 세령을 죽인 범인임을 눈치챈다. 오영제는 최현수를 단죄하려 한다. 오영제는 최현수의 아내를 살해하고 서원을 납치한다. 그리고 서원을 살리기 위해 최현수가 댐의 문을 열게 만들어 수목원 아랫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키게 만든다. 그 후 자신은 몸을 감추고 최현수를 미치광이 살인마로 만들어 버린다.


죽은 사람으로 숨어 살면서 오영제는 서원을 사회 부적응자로 만든다. 그리고 최현수가 사형당하는 날 서원도 함께 죽이려는 잔인한 계획을 짠다. 그러나 오영제의 음모를 눈치챈 아저씨와 아버지의 계획으로 서원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난다.


서원은 사형당한 아버지의 유해를 수습하여 바다 밑에 뿌린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생일 축하 인사를 한다.

 해피 버스데이.

웃는 해골을 선물했던 6살의 그날처럼.


정유정 작가는 <7년의 밤>에서 글자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재주를 부렸다. 난 글을 읽으면서 그림을 넘기고 있었다. 묘사가 잘 되었다는 의미다. 글자가 그려낸 그림은 책장을 빨리 넘기게 했고, 긴장감 넘치는 서사는 책 앞에 나를 잡아두었다. 부러운 필력이다.


가끔은 아니, 자주 경험했던 일을 글로 쓰는 일이 어렵단 걸 느낀다. 그런데 존재하지 않는 실체를 형상화하는 소설은 얼마나 힘이 들까?


상상력만으로 구체적 형상물을 만들어 내는 소설가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상상력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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