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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구슬 Mar 10. 2020

흰머리 염색하는 아내와 흰머리 뽑는 남편

세월이 검은 머리를 파뿌리로.

 한 달이 넘도록 미용실엘 가지 못했다. 미용실은 커트나 펌을 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나처럼 나이 든 중년의 여성들은 그런 목적 외에 염색이란 것을 하기 위해 찾아가는 곳이기도 한다.


 가끔 나이가 들어 서러울 때는 내면을 키우는 일과 더불어 외면도 키워야 함을 발견했을 때다. 젊었을 때야 길게 늘어뜨린 머리에 티셔츠와 청바지만으로도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지만 나이 들어선 그런 단순한 모습에서조차 나잇값 못하는 모습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게 나이 든 사람의 현실이다.


 내면이 단단하면 외양이 어떤 모습이건 상관없지 않냐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나이 드신 시어머니 앞에서 하얀 머리칼을 나풀거리며 다닐 때면 나의 흰머리는 시어머니의 나이듦을 서운케 하는 행위요, 젊음을 포기한 모습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다. '이건 불효다'란 생각이 거기에 미치게 되면 내면의 단단함만으론 그 모습을 고집할 수가 없다.


 커트나 펌을 하지 않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어 생활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나 희끗희끗 올라와 두피 주변을 하얗게 물들이고 검은 머리와의 경계를 그어버린 흰머리의 반란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다.


 흰머리의 도발은 그나마 젊은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자신을 정체성조차 불분명한 새로운 세대로 만들어버린다. 학생들은 흰머리를 보며 나의 나이를 묻는다. 나의 나이를 젊게 봐준 것이다. 그 나이에는 그렇게 흰머리가 많지 않을 거라는 의아함에서 오는. 그래서 커트나 펌은 포기하더라도 염색만은 그럴 수가 없다.


  휴일의 나른함이 끝나가는 일요일 오후, 남편에게 염색을 부탁했다. 남편은 좀 일찍 미용실을 갔다 오지 그랬냐며 투덜거린다. 귀찮다는 거다. 그래도 어쩔 수 있나 나가기 싫다며 꾸역꾸역 우기는 부인을 이길 수가 없는데.


 "염색하기 귀찮으면 나처럼 그냥 다 뽑아버려"

 "아이 정말,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내 흰머리를 다 뽑아버리면? 그럼 나보고 대머리가 되란 말이에요?"

 "대머리 좋잖아. 시원~ 시원하고"


 남편은 나보다 흰머리가 적다. 나이는 많은데 속이 없어 늙지 않는 것인지 흰머리는 어쩌다. 하나씩. 듬성듬성 보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보이는 족족 족집게로 쏙쏙 뽑아버린다. 내가 '그러다 대머리 된다''아까운 머리 그만 뽑으라'고 잔소릴 해도 본인은 대머리가 돼도 상관없으니 걱정하지 말란다.


 난 대머리 남편은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자가 대머리 되는 모습에선 어색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여자는 어떤가? 그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남편은 대머리가 도 상관없으니 미련 없이 흰머리를 뽑는다. 머리가 뽑힐 때마다 느껴진다는 쾌감도 즐긴다. 그러나 나는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이 소중하기에 눈이 나빠지고, 머리카락이 상하는 고충을 감수하고서도 염색을 한다.


 "사람이 자연의 이치를 따르며 살아야지. 왜 그걸 거역하려고 해. 그냥 자연스럽게 늙어가~"

 "누가 그걸 몰라요. 하지만 난 싫다고요. 난 내 자신이 당당하지 못한 사람이라 이렇게라도 감추고 싶다고요"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이거 다 해 주면 얼마 줄 거야? 나 비싼 몸인데"

 "이 사람이 진짜. '받아라 수갑, 먹어라 콩밥' 해야 정신 차릴래요"


 그렇게 저물어가는 일요일 오후, 남편은 자신의 부인이 나이 듦을 아쉬워하며 염색을 해 주었다.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살라는 주례사를 지키려는 건 아니었는데 살다 보니 어느새 검은 머리는 파뿌리가 되어 있었다.


 흰 머리카락 하나가 아쉬워 염색을 고집하는 아내와 몇 개 나지 않은 흰머리 정도는 미련 없이 뽑을 수 있다는 남편이었지만 둘 모두, 말없이 흐르는 세월 앞에서 자신들이 늙어가고 있음을 애틋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늦은 오후 한나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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