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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제삿날도 모르는 무식한 딸.

윤달이라니...

by 은빛구슬
아빠의 제삿날을 잘못 표시했다.


동생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늘 아빠 제사였어. 끝나고 난 집에 가네'


엥? 무슨 제사.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 제사라니. 문자를 다시 읽었다. 분명히 제사라고 했다. 멍해졌다. 이게 무슨 말이지? 스마트폰을 든 채 정지해 있던 나는 화장대 옆에 걸린 달력으로 달려갔다. 6월의 촘촘한 숫자 중 두 곳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 곳 바로 밑에 선명하게 '아빠 제사'란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아빠 제사는 분명 6월이었다. 그런데 이건 뭐지? 동생이 왜 이런 문자를 했지?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동생은 비꼬는 듯 투덜거렸다. 뭐가 바빠 아빠 제사도 잊고 사냐고. 난 황당하고 억울한 마음에 제사는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무슨 제사를 지냈냐고 따져 물었다. 동생이 날짜나 제대로 보고 말하라고 해서 난 동그라미 된 나의 달력을 계속 응시하며 맞다고.. 분.명.히 동그라미를 해두었다고 방방 뛰며 억울해 했다. 동생이 귀찮다는 듯 알았다며 달력 한번 다시 살펴보고 내년 제사는 잊지 말고 참석하라는데 괜히 서운한 맘에 눈물이 나려 했다.


동생과의 전화를 끊고 다시 달력을 살폈다. 5월과 6월의 달력을 번갈아 가며 꼼꼼히 살폈다. 아빠의 제사는 음력 4월이다. 그런데 5월의 달력에 음력 4월이 있었다. 6월에도 4월이 있었다. 그런데 6월의 4월 앞엔 윤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 윤달이란 뜻이었다.


윤달, 윤년에 드는 달로 달력의 계절과 실제 계절과의 차이를 조절하기 위하여 1년 중 어느 한 달을 더 만든 달이다. 올해는 4월에 윤달이 들었다. 즉 4월이 두 번 있다는 말이다. 제사는 음력 4월 제 날짜에 맞게 지내졌고, 나는 윤달 4월에 호기롭게 동그라미를 쳐 두었던 것이다. 나의 신중하지 못한 행동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난 음력 날짜만 찾아 동그라미를 했지 그게 윤달일 수 있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하지 못했다. 상상도 못한 일이다.


새해가 되면 제일 먼저 달력에 집안 행사를 표시한다. 깜박거리는 기억력을 믿을 수가 없는지라 혹시라도 발생할 지 모르는 실수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행동이다. 스마트폰에 기록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날마다 자연스럽게 쳐다보는 달력이 익숙한 사람이기에 이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번 달 역시 달력을 확인했다. 그런데 5월 어디에도 '제사'란 글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의 전화가 더 황당했던 거다. 잘못된 날짜를 표시한 줄도 모르고.


엄마에게도 전화를 했다. 대뜸 화를 냈다. 오지 않으면 연락이라도 줘야지 왜 연락을 하지 않았냐며 따져 물었다. 뭐 뀐 놈이 성낸다더니 내가 바로 그 꼴을 하고 말이다. 엄마는 화를 내는 나의 말에는 아랑곳 않고 오히려 오지 않는 나를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무 일 없으면 됐다고, 올해 못 왔으면 내년에 오면 되지 않냐고 다독였다. 난 또 윤달을 들먹였다. 변명이라도 해야 나의 잘못이 희석될 거 같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윤달은 공달이니 제사는 본 날짜에 지내야 하는 게 맞다고 말해 준 뒤에야 나는 나의 행동을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윤달, 어렵다. 윤달은 1년 12개월 외에 몇 년만에 한 번씩 들기 때문에 여벌달, 공달이라고도 부른다. 보통의 달과는 달리 걸릴 것(나쁜 것)이 없는 달이기에 무슨 일을 하든 탈이 없다고 하여 윤달에 결혼을 하거나 이사를 하고, 나이드신 분들은 극락왕생을 바라며 수의를 준비한다고 한다. 한마디로 어쩌다 한번씩 찾아오는 보너스와 같은 달이라 보면 된다. 그래서 제사나 생일에 윤달이 들면 제 날짜에 제사나 생일을 지내고, 손(탈) 없는 윤달에도 제사나 생일을 지내 두 번의 제사와 생일을 지내는 사람까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바쁜 시기에 행사를 두 번씩이나 치르는 수고를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기도 하다. 어찌 되었건 윤달은 좋은 의미의 달이긴 하나 12개월의 본 달은 아니란 뜻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만약 이 제사가 시댁의 제사였다면 내가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아마도 난 제사가 든 달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빠의 제사였기에, 내가 책임지고 지내야 하는 제사가 아니였기에 윤달이라는 것을 확인도 안 하고 무조건 음력 날짜에 동그라미를 했던 거다. 난 며느리 역할만 할 줄 알았지 딸 노릇은 제대로 하지 못한 나쁜 딸이었다.


왜 시댁일엔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친정일은 참석하는 걸로 의무를 다 했다고 생각할까? 시부모님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면서 엄마에겐 함부로 말하고 대해도 된다고 생각할까? 단순히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무례하게 굴어선 안 될 것 같은데 자꾸 친정일에선 멀어지고 시댁일만 챙기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정말로 듣기 싫었던 '출가외인'이란 말을 내가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다. 시집살이를 하니 시댁 일만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속상하다.


부끄럽게도 올해 아빠 제사의 불참은 윤달이라는 핑계에 있지 않았다. 그건 친정일에 적극적이지 못한 나의 마음에 있었다. 이런 나의 마음에 욕이라도 한 바가지 하고 싶은 날이다. 윤달의 개념도 모르는 무식한 딸이라고 자책하고 싶은 날이다.


흥분하고 반성하며 글을 쓰고 있는 나,

그렇다면 내년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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