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인 하루

사랑하는 사람들과, 남한산성에서

by 운동하는 훈장님

“그럼 오후 5시까지 찾아뵐게요 형님!”


2주 전이었을까? 공휴일을 이용해서라도 꼭 형님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찾아뵐게요.’라는 말이 인사치레의 역할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동시에 어지러운 마음을 터놓고 싶은 마음. 그와 동시에 그냥 보고 싶은 마음이 함께 작용했다. 그렇게 남한산성역 인근 형님이 운영하시는 카페로 향했다.


주차장에 가자 보이는 형님의 차. 벌써 반가운 마음. 함께 간 애인 현경에게 ‘이거 형님 차다 ㅎㅎ’라고 말하고 1층으로 향했다. 바로 마주친 형님. 자연스레 함께 건넨 악수. 바쁜 상황 속에도 또렷하게 보이는 형님의 미소에 형님과 함께할 시간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형님이 내려준 커피, 그리고 빙수를 먹고 현경과 각자 책을 읽었다. 나는 예술에 관한 책, 현경은 페미니즘에 관한 책. 나와 현경은 남성을 위한 페미니즘 책을 함께 읽기로 했다. 그 책을 현경이 먼저 읽기 시작한 것인데 현경이 “저자가 수연이랑 비슷한 상황을 겪은 것 같아.”라며 한 구절을 읽어줬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게 된 건 여성을 이해하기 위함보다 나를 둘러싼 남성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는 작가의 말이었다. 내 요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이 분열된 사회에서 남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디도 기댈 곳이 없다고 생각되는 요즘. 현경이 건네준 함께 공부해 보자는 손길, 그리고 읽어준 구절 모두 따뜻하게 다가왔다. 아직 책을 열어보지 못했으나 이미 희망의 상자를 열어본 기분을 느꼈다.


형님의 퇴근 시간. 우리는 밥을 먹으러 갔다. 이왕 왔는데 돼지보단 소 먹자며 맛집으로 데려가주셨다. 식당에서 형님께 고민을 이야기했다. 많은 2-30대 남성과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고. SNS를 보면 저랑 꽤 가까운 사이로 지냈던 사람들이 이젠 저를 혐오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쭉 나누고 나니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형님은 “아우야 괜찮다.”라고 연신 외쳐주는 듯했다. “나는 어렸을 때 경상도에 있었는데 얼마나 더 외로웠겠니.”라는 형님의 말씀에 큰 위로를 얻기도 했다.


형님의 제안으로 남한산성에 갔다. 매번 형님 차를 얻어 탔는데 이번엔 내가 운전하는 차로 이동했다. 차로 남한산을 오르는 길에도 이야기 꽃은 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운전길이 내 기준 험한 편이라 집중하는 사이 형님과 현경 사이에 계속 대화가 오갔다. 해가 슬슬 질 무렵 풍경에 대한 이야기, 잠실이 보인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아있다. 운전 중이라 보지 못해 눈으로 담지는 못한 풍경이라 살짝 아쉽다.


주차를 하고 내리니 도심 밖으로 나온 느낌이 물씬 났다. 성남 이모들 집에서 종종 근처를 왔던 것 같은데 느낌이 확 달랐다. 초록보단 푸르른이 어울리는 나무들이 세월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여기가 왕이 피신하던 곳이야.” 형님의 도슨트를 들으며 하는 산책. 문득 아빠가 겹쳐 보였다. 문화재 보수 설계를 했던, 세상의 꽃과 나무 그리고 동물들에 관심이 많았던 우리 아빠. 어디를 갈 때마다 우리의 박물관장을 도맡아 했던 아빠가 형님에게서 보였다. 앉을만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더니 어느새 어두워진 남한산성. 거기서 우린 공통의 추억 여백서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형님께서 들려주시는 전영애 교수님의 이야기는 언제나 가슴을 울린다. 마치 전영애 교수님 특유의 떨리는 음성이 들리는 착각을 경험한다. 이 시대의 어른. 나는 이런 말이 전 교수님께 참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뜬금없는 시 낭송 이야기. 갑자기 독일어로 시를 노래할 때가 있다고 하신다. 번역을 하기 위해 그 나라의 언어를 깊게 공부하고, 그 나라에 가 문화를 직접 경험하는 교수님은 시에 운율이 풍부히 담겨 있다고 말씀하셨다. 귀여운 카나리아, 그리고 구슬픈 울음이 동시에 떠올랐다.


“이제 집에 가자!”하고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는 길에 갑자기 형님이 파전 하나만 먹고 가자고 한다. 안 먹으면 후회하실 것 같다고. ‘그래 또 우리 여기 언제 올지 모르니까.’ 나와 현경은 ”콜! “을 외친다. 나만 좋아하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 음악이 함께 하는 파전집. 생각 외로 너무 맛있었던 파전집. 갑작스러움으로 비롯된 낭만 때문일까 더 깊은 감칠맛이 느껴졌던 것 같다.


차를 타고 하산. 형님을 내려드리며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 친구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형님께 드린다. “철학자들은 헤어질 때 ‘다음에 또 이야기합시다.’라고 했대요. 다음에 또 이야기합시다!!” 형님이 내리자마자 현경에게 말한다. “오늘 너무 좋았다 그렇지!!” 현경도 내 말에 동의해 준다. 2주간 꽤나 힘들었던 마음들이 무게를 덜어내는 하루였다. 순수함을 가진 어른들이 주변에 있기에 나아갈 수 있음을 알게 된 하루. 동시에 나도 형님처럼 맑은 눈을 유지하며 동생들에게 사랑과 진심을 베풀며 살아가야겠음을 다짐한 하루였다.


꿈과 같이 아름다운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와 바로 꿈나라로. 일어나 달리기를 하러 가는 오늘. 이 기억이 잊히지 않았으면 해 글로 옮겨 적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하루를 놓치지 않고 살아갔는 인생을 살겠노라 마음먹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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