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 대신 변화를 택한 이유
타지생활을 한 지도 벌써 9년째다.
21살에 런던으로 유학을 왔고,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면서 내 삶은 그렇게 여기까지 흘러왔다.
혼자 결정하고, 혼자 버티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나는 어느새 살가운 딸은 아니게 되었다. 타지생활을 하다 보니 내 성격은 180도 달라졌다. 힘든 이야기가 있어도 굳이 꺼내지 않고, 혼자서 묵묵히 버티는 게 맞다고 생각해 왔다. 감정을 표현하는 건 어쩐지 미성숙한 사람처럼 느껴졌고, 그래서 멘탈적으로 힘들 때일수록 엄마와의 전화도 일부러 피하게 된다. 그래도 엄마는 늘 2주에 한 번은 통화하자고, 영상통화하자고 하신다.
어제는 정말 오랜만에 엄마와 통화를 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이직하느라 우울하진 않은지, 괜찮은지 계속 물으셨다. 작년엔 많이 힘들었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았다. 잘 지내고 있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만 말했다. 부모님은 이제 예순이 넘으셨다. 나는 내가 서른이 되면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고, 돈도 어느 정도 모아두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도 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 미래가 너무 당연하게 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불안정하고, 모아둔 돈도 거의 없고, 나 하나 먹여 살리기도 빠듯하다. 런던 집세는 계속 오르고, 환율은 2000원을 찍었다. 조금씩 모아둔 세이브 통장에서 쓰다 보니 결국 바닥이 보였고, 지금은 부모님께 도움을 받고 있다. 부모님은 두 분이서 여행도 자주 다니시고 잘 지내신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딸이 해외에 있으니까 여행 가라고 보내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그런 경험들을 은근히 부러워하셨던 것 같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린다.
나는 지금 그런 걸 해드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부모님은 이해한다고 하시지만, 아빠가 늘 “내돈내산”으로 엄마와 맛있는 거 드시러 가시는 걸 보면 아빠도 말씀은 안 하셔도, 한 번쯤은 딸이 사주는 비싼 레스토랑, 딸이 보내주는 여행을 기대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그럴 때마다 괜히 더 죄송해진다. 엄마가 수화기 너머에서 담담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는 걸 듣다가 나는 말없이 울었다. 소리 내지 않고, 들키지 않게.
내가 해외에 있는 게 맞나. 나도 그냥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는 게 맞는 선택일까. 부모님이 가장 바라는 건 결국 안정적인 직장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삶은 조금 다르다. 안정적인 수입이 있으면 좋겠지만, 익숙함보다는 변화를 선택하는 삶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는 삶이다.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건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9년 동안 크게 불평하지 않고 살아왔다. 최근 들어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VFX 시장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좋지 않다. 부모님도 그걸 아시기 때문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못하시고, 내 삶에 간섭하는 걸 내가 정말 싫어한다는 것도 아셔서 조심스러워하신다. 그래도 잔소리는 여전히 하신다.
한 해가 지날수록 부모님과 통화하거나 영상통화를 할 때마다 깜짝 놀란다. 언제 이렇게 주름이 늘었을까. 나는 인터스텔라 속에 혼자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1살에 런던에 온 이후로,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데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 가족, 친구들은 분명히 시간을 지나오고 있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들 하지만, 나는 언제쯤 안정적으로 살면서 부모님께 도움이 되는 딸이 될 수 있을까. 불안정한 업계에서 단기 계약으로 살아가는 직장인으로 계속 가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진짜 내 브랜드를 만들어야 하는 걸까.
이 고민의 중심에는 결국 ‘내가 뭘 할 수 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이 있다. 컨셉 디자인이나 매트 페인팅 아티스트라면 비교적 홀로서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나의 직은 paint & roto 아티스트다. 페인트 로토는 사실 홀로서기를 하기 애매한 파트다. 컴포지팅과 함께 결합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 둘은 떼려야 뗄 수가 없다. 하나만 잘해서는 퀄리티도, 디테일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나는 광고 쪽에서는 컴포지팅 작업을 해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영화 업계에서는 그 경험이 많지 않다. 그래서 늘 애매한 경계에 서 있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니다. 보는 눈은 분명히 있어서, 누군가의 포트폴리오를 보고 피드백을 줄 수 있는 단계까지는 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걸로 혼자 설 수 있을까’라는 질문 앞에서는 자꾸 망설이게 된다. 그래도 일단 시작은 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멈추지는 말아 보자는 마음으로 설레면서도 솔직히 많이 무섭다. 나는 VFX 기술만 배워왔지, 브랜딩 하는 법이나 마케팅, 다른 영상 제작 프로그램에는 익숙하지 않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과연 마케팅이 맞는지도 잘 모르겠다. 유튜브와 책을 보면서 그때그때 해결책을 찾아가고 있지만, 정말 프리워커가 되어야 하는 건지,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시점인 건지 계속 고민하게 된다.
새로운 시작이라 흰 도화지 앞에 선 것 같은 설렘이 있다. 내가 원하는 색을 마음껏 칠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 하지만 동시에 이 과정이 결과로 이어지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도 늘 함께 있다.
성공한 사람들의 전기나 다큐, 책을 보면 다들 자기 인생의 멘토를 만났다고 한다. 런던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VFX 업계 안에 있는 직장인들이다. 그 안에서는 배울 수 있는 게 한정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숙제는 분명하다. 자기 이야기를 세상에 잘 전하고, 브랜딩을 통해 자기 길을 만들어온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하고, 배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