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부터 손으로 꼼지락꼼지락 거리는 걸 좋아했다. 6살 때 처음 외할머니한테 배운 대바늘 뜨개질이 너무 재미있어서 멈추지 않는 나를 보고 엄마와 할머니는 신기한 아이라고 했다. 중고등학교 실과 시간에 하는 바느질 시간에 다른 친구들이 엄마가 대신해주던 과제들을 난 제일 즐겁게 했고 좋은 점수도 받았다. 많은 시간과 자유가 주어진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는 코 바느질 삼매경에 빠졌었다. 집에 틀어 박혀서 하얀 레이스 실로 화장대보를 만들고 친구들에게 선물하는 것이 즐거웠다. 미국에서 첫 직장인 홍보대행사에는 여자 직원이 많았다. 난 뜨개질 클럽을 만들어 일주일에 한 번씩 뜨개질 수업을 열었고 실 사러 백인 동료들과 돌아다녔던 기억은 벌써 20년 전이구나. 그 이후로는 결혼과 육아로 나의 손놀림은 일할 때 컴퓨터 칠 때와 요리하고 아이 기저귀 갈아줄 때 빼고는 쓰질 않았다.
생각해 보면 나의 취미는 동적이지 않았다. 엉덩이 깔고 앉아서 바늘과 실로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것에서 알 수 없는 희열과 성취감을 느끼며 행복했었다. 그 행복감을 다시 느끼고 싶었던 참에 몇 년 전 우연히 한국 전통 조각보 수업을 실리콘 벨리에서 배울 수 있는 행운의 기회가 주어졌다. 과거 한국에 살 때는 별 약속이 없어도 인사동을 걸으며 색이 아름다운 전통 조각보들과 작은 어항에 물고기를 보는 것을 좋아했던 추억이 있다.
조각보 바느질은 이전에 배운 뜨개질과 차원이 다른 섬세함과 인내가 따른다. 잘은 못해도 회사 점심시간 틈틈이 몰래 나가 수업을 들었다. 머리카락만큼 가는 실로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볼 수도 없는 한 땀 한 땀. 천과 천 사이를 이어 갈 때 내 머릿속은 완벽하게 비워진다. 초 집중을 해야만 같은 간격을 유지하면 감침질을 할 수 있고 천과 실이 함께 어울려 예술 작품이 된다.
코로나 창궐로 자택 근무가 되고 아들은 집에서 수업을 할 때 주어진 시간을 어쩌지 못해 바느질로 바늘방석을 만들기 시작했다. 작은 바늘방석 하나 만드는데 5시간 이상이 든다는 것을 해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곧 끝나고 정상으로 돌아갈 줄 알았았던 코로나가 2년 이상 길어질 줄은 정말 모르고 한두 개 만들기 시작한 바늘방석은 30개 넘개 만들며 2020년을 보냈다.
솔직히 난 아날로그가 내 스타일이다.
지난 25년 가까이한 일은 기술 관련 회사의 마케팅이다. 특히 실리콘 벨리에서 최 첨단 회사들을 위한 홍보를 하고 반도체 회사에서 마케팅 책임자로 있으면서 최근 기술 트렌드를 가깝게 접할 수밖에 없다. 요즘은 코로나로 가속화된 Digital transformation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어쩌고저쩌고 말하고 있고 뒤쳐지면 안으려고 따로 공부도 하고 전문가의 강의도 기웃거리고 했다. 메타 버스, NFT, 코인 등등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나는 아니더라고 아들 세대를 위해 이 정도는 알아야 되겠다는 이유이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건대 난 시대가 디지털 시대로 달려가면 갈수록 나의 마음이 애타고 향하고 있는 방향은 느린 미학 아날로그이다. 남들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갈 때 난 일부러 다른 방향을 가는 청개구리 성향도 한몫할 수도 있겠고 아날로그 시대의 낭만을 기억하는 X세대여서 일수도 있겠다. 응답하라 1988!
조각보 바느질로 조각난 마음을 붙인다.
올 1월부터 잠시 손을 놓았던 바느질을 다시 시작했다. 이번에는 작은 바늘방석이 아닌 사이즈가 제법 큰 한 벽이나 긴 창문을 가릴 수 있는 발을 만들었다. 나에게 힐링이 필요함을 간절히 느껴진다. 디지털 트랜스 포메이션의 현기증과 주위에서 나를 압박하는 사람들과 관계에서 나는 과부하로 마음과 머리가 아프다.
- 자신의 잘못을 나에게 돌리는 인간성 제로인 나쁜 보스로 인한 스트레스
- 한국에 2년 이상 가지 못해 한국 드라마에서 멋진 커피숍만 보고도 눈물이 나오는 향수병
- 전 세계가 겪으며 많은 관계를 단절시키고 있는 코로나 블루
- 엄마가 무슨 죄인지 사춘기 아들은 온갖 짜증을 나에게 부리고 대화가 되지 않아 고구마 100개 먹은 것 같은 답답함
- 불면증을 동반한 나의 갱년기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하면서 마음을 치료하고 힐링을 경험한다. 너무도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생긴 마음의 과부하가 바느질로 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