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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한 Jan 21. 2018

<삼삼한 이야기> 그 119번째 끈

나의 안경

01 열 여섯, 안경

열세 살부터 안경을 꼈다. 처음엔 미세하던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의 시력 차이가 점점 벌어져, 열셋 어느 신체검사날에 보건 선생님으로부터 안경을 써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안경이 코를 짓누르고 눈을 작게 보이게 하는 것이 싫어 잘 쓰고 다니지 않았다.

비록 오른 눈으로 보는 세상은 블러 처리를 한 듯 뿌옇게 보였어도 왼쪽 눈은 1.0의 시력을 자랑했기 때문에. 그 눈이 평생 갈 줄 알았다. 그땐.


열여섯에도 안경을 잘 쓰지 않았다. 꼈다 뺐다 해서 엄마의 잔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은 생각이 잘 통하던 친구와 이런 얘기를 나눴다.

"안경을 쓰면 세상과 나 사이에 벽이 생긴 것 같아. 내 힘으로 세상을 뚜렷하게 보는 게 아니라 기분나빠. 그리고 사실 알고 보면 안경 때문에 세상이 잘 보이는 게 아닐지도 모르지. 안경에게 속고 있는 건지도..."

그런 얘기를 맞장구쳐주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02 스물 셋, 안경

아이유, <안경> 가사

내 나이 스물셋에 나온 아이유의 <Chat-shire>앨범에는 ‘안경’이라는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그녀와 나는 동갑이라 ‘스물셋’, ‘팔레트’ 같은 노래에서 그녀가 살고 있는 23, 25의 나이를 노래할 때마다 왠지 모를 동질감 혹은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아이유가 스물세 살에 발매하고 나도 스물셋에 들은 노래 ‘안경’에서 아이유는 “더 작은 글씨까지 읽고 싶지 않아” 하는 피곤함을 노래했다. 한창 렌즈에 익숙했던 나는 사물을 더 뚜렷하게 보게 하는 '안경'이라는 소재보다, 사람에 피곤함을 느껴 약간의 거리를 두고 싶은, 자세히 알고 싶지 않은 마음에 더 공감했다.



03 스물여섯, 안경

근래 끼고다니는 안경.

최근 일주일, 집을 나설 때 안경을 꼈다. 렌즈를 끼고 그 위에 도수 없는 안경을 덧썼다. 렌즈를 끼는 수고가 사라지는 것도, 안경이 멋을 더해주는 것도 아니고, 닦아야 하는 수고만을 더하는 안경을 '굳이' 쓴다.

이 안경에는 사물이 더 멀어지게, 하나의 막을 덧씌우는 기능이 있는 듯하다. 모니터를 장시간 봐야 할 때, 사람의 얼굴을 볼 때, 매일 매시간 매초 세상을 바라볼 때. 안경을 덧쓰면 사물과 내가 밀착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덜하다. 그래서 안경을 쓴다.

열여섯의 안경은 세상과 내가 닿는 것을 가로막는 속임수였는데 스물여섯의 안경은 세상과 나에 거리를 조금 주는 보호막이다. 내가 변해서, 안경도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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