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서점에 간다. 도서관에 찾는 책이 없을 때, 내 책이 갖고 싶을 때, 밑줄을 긋고 싶을 때, 새 책을 사기 부담될 때, 사람들이 어떤 책을 팔았는지 궁금할 때, 그냥 책이 가득한 곳에 있고 싶을 때.
또 있다.
퇴근하고 집에 가기는 싫은데 어딜 가야할지 모르겠을 때, 마음이 심란할 때, 오래된 책 냄새를 맡고 싶을 때 등등.
실컷 책 구경을 하다 보면 꼭 두어 권씩 갖고 싶은 책을 발견한다. 중고책 두 권은 싸면 만 원이 채 안되고, 신간이라 가격이 좀 있어도 2만 원이 넘지 않을 때가 많다. 중고서점이 있는 합정, 건대에서 약속이 잡히는 날엔 시간을 때우러 들어갔다가 친구가 읽으면 좋겠다 싶은 책을 사들고 나오기도 한다. 아무리 사람들이 책을 잘 읽지 않고, 책 선물이 최악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도 내가 주는 책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다(착하네 참). 책 선물 고르기는 내 작은 기쁨이다.
어제도 퇴근하고 중고서점에 들렀다가 루이제 린저의 소설 <생의 한가운데>와 박완서의 에세이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샀다. 9월을 시작하는 나에게 주는 선물이다. 책밭에서 보물을 발견한 것 같아서 기분이 참 좋았다. 보물을 발견하는 날이 있는 반면, 허탕치는 날도 있다. 중고서점의 단점은 책이 다양하지 않다는 거다.
같은 책이 여러 권씩 책장에 꽂혀 있는 경우도 있고, 내가 찾는 책이 서울 모든 알라딘 중고서점에 없을 때도 있다. 며칠 전,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찾았을 때 바로 그랬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알라딘에 자주, 많은 양이 매입되는 책은 가격이 싸고, 잘 안 들어오는 반면 들어오는 족족 팔려나가는 책은 중고치곤 비싸다. 파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전자는 아쉽고 후자는 쏠쏠하다.
나도 중고서점에 책을 여러 번 팔았다. 처음 책을 판 건 2년 전 겨울이었다. 이사 가기 전에 공간 정리도 하고 용돈도 벌 겸사겸사 책을 배낭에 지고 가서 합정 알라딘에 팔았다. 그때는 괜히 책들한테 미안했다. 게다가 그 돈을 함부로 쓰면 안될 것 같아서 다시 책을 샀다. 지금 생각해보면 실로 코미디다. 이삿짐을 줄이려고 책을 팔고 그 돈으로 다시 책을 사오고....
예전에 한 회사 동료는 "책을 어떻게 팔아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땐 그 말이 참 듣기 싫었다. 마음속으로만 외쳤다. '책을 좋아하면 팔지도 못해요?' 나는 집은 없고 취향은 있어서 이젠 책을 쉽게 팔 수 있다.
집의 크기와 상태가 일정치 않아서 지금 사는 집에 책상을 사기 전까지는 북엔드를 이용해 바닥에 책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책상을 사고나서야 넓어진 수납 공간 덕에 책을 더 많이 사들이기 시작했으나, 곧 과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작은 바구니, 상자 등을 이용해 책을 겨우겨우 수납하고 있다.
다음 번 이사를 가기 전엔 책 솎아내기 작업을 해야 한다. 정말 평생 가지고 살고 싶은 책만 빼고 다 팔아넘기는 과정이다. 한때 책을 파는 데서 양심에 가책마저 느꼈던 쫄보가 오만하게도 감히 책을 솎아낼 수 있게 된 건 팔할이 취향 덕분이다.
뚜렷해진 취향 덕에 아무 책이나 평생지기로 삼지 않게된 것. 마음을 끌지 않는 책은 가차없이 아웃! 이런 적도 있다. 참여하던 독서모임의 주제 도서가 <언어의 온도>여서 급히 책을 샀다. 좀 읽다 보니 별 게 없었다. 예쁜 문장 몇 개가 눈에 들어왔을 뿐이고 생각의 변화 내지는 감동적인 울림도 없었다.
그런 책이 베스트셀러라니. 출판을 시도한 건 박수받을 만하지만, 나는 오만하게도 책의 수준이 천지차이라는 생각에 슬펐다. 그래서 벼르고 벼르다가 독서모임이 끝나고 바로 중고서점에 팔아버렸다.
재밌는 건, 이 이야기를 몇 친구에게 들려줬더니 되려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궁금해지네?"라며 책을 샀댔다나 뭐라나... 어쨌든 책이라면 무작정 좋아하기보다 기준과 취향이 생기니 책을 처분하는 일이 더 쉬워졌다는 이야기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이제까지 중고서점에서 어떤 책을 사고 팔았는지 궁금해졌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중고매장에서 책을 샀다. 통상 2~3권 꼴이다. 이렇게 들여다보니 표시된 날짜에서 그날의 기억이 읽힌다. 합정에서 친구를 기다리다가 재빠르게 한 권 골라 선물한 날, 타이베이 여행을 가기 전에 ‘뭐라도 알고 가야지’ 싶어 그 도시에 관한 책을 사러간 날, 갑자기 룸메들(전 룸메 포함)에게 책을 주고 싶었던 날...
판매 기록은 작년 여름에서 멈춰 있다. (역시 <언어의 온도>다...) 집에 책이 널려 있는 이유일 거다. 읽고 싶어서 샀다고, 추천받아서 샀다고 다 좋은 책은 아니었고, 맘에 들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그리고 책을 좀 팔러 가야겠다. 마침 계절이 변했으니까 책을 팔고, 다시 책을 좀 사고, 누구를 만나게 되면 책 선물을 해야지. 가을이니까, 9월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