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을 바라봐(?)
사람의 눈을 바라보다보면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미운 사람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다보면 어느샌가 미움이 녹기도 한다. 눈에는 그이의 우주가 담겨 있고, 그이의 슬픔이 엿보이고, 언어로 전달하지 못하는 감정을 이식받듯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그래서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나보다. 그래서 허모 씨는 그렇게도 ‘내 눈을 바라보라’고 외쳤나보다.
눈이 아름다운 이의 눈을 바라보는 일은 즐겁다. 나와 다른 색을 색을 가졌다면 내 눈은 새까만데 네 눈의 색을 왜 갈색이냐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즐겁다(눈동자 색깔은 멜라닌 색소의 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색깔의 이름을 찾듯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눈만 바라보다가 하루가 다 가버려도 좋을 것 같다.
어느 날은 얼굴에서 유일하게 만질 수가 없어 눈이 더 애틋한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가까이서 보았다가 멀리서 보았다가 거리를 좁혀보고 늘려도보고 눈을 대신해 눈가를 지긋이 눌러보고 눈썹을 만지작거려도보고 속눈썹을 살짝 잡아당겨도보고. 다래끼가 날 수 있으니 더 이상은 그만.
눈이 슬픈 이의 눈을 바라보는 일은 걱정스럽다. 말없이 눈만 바라봤을 뿐인데 슬픈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자기 안의 말을 이어 나가는 그의 눈을 보았는데, 처음엔 수줍고 민망한 빛을 띠던 눈에 금세 슬픔이 가득해지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내 눈에 그를 걱정하는 내 진심의 빛이 담기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부디 그 마음이 전해졌기를. 아주 잠깐 동안 눈을 바라보았던, 그래서 단 5분 가량을 알았을 뿐이지만 금세 가까운 사이가 된 듯했던 그 행인에게.
남의 눈을 보다보면 자연스레 이 생각에 미친다.
내 눈은 지금 어떤 빛을 띠고 있을까?
내 눈을 나와 같이 바라보는 사람을 마주하면 속마음을 들킨 듯 부끄러워진다. 겉모습은 꾸며낼 수 있다. 연예인들의 화보에서나 쓰는 용어라고 생각했던 ‘컨셉’은 하루하루의 옷차림, 화장법 등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상의 하루짜리 내 모습에도 통용된다.
이 ‘컨셉’에 따라 행동과 말씨조차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잠깐은 가장할 수 있지만, 눈빛까지는 어렵다. 연기자들이야 쉽게 해낼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 인생의 무대에서 번번이 눈빛 연기에 실패했다. 그래서 솔직한 사람, 아니 솔직하고 싶고 솔직해야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무리 꾸미고 숨겨도 사람들이 내 눈을 보면 나는 다 들킬 것이 뻔하니까. 똑똑하지 못해서 거짓말에도 능하지 못하니까. 애초에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한다.
대신 내 눈이 동시에 여러 감정을 품고마는 복잡한 심리 중 가장 우세한 감정만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80의 사랑과 20의 증오라면 사랑을, 70의 분노와 30의 두려움이라면 분노를. 적확하게 보여주고 싶다. 그렇지만 또 그것이 어떻게 사람 마음처럼 될까. 다른 사람들의 눈동자를 통해 내가 보는 복잡한 것들을 그들도 내 눈동자를 통해 읽어내겠지. 느껴내겠지.
그냥 더 솔직해져야겠다. 온몸과 정신이 솔직한 사람의 눈이 탁하다거나 정직하지 못하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으니까. 그리고 눈으로 전해지는 감정을 더 세밀하게 포착하고, 또 반대로 전해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내게 눈이 주어진 이유가 단지 보기 위함만은 아닌 것 같다. 눈은 정말 마음이 오가는 창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