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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한 Dec 07. 2018

<삼삼한 이야기> 그 209번째 끈

이사

01

이사는 자취생의 숙명이다. 고향에서는 딱 한 번, 대여섯 살 때 아파트로 이사해서 몇 년 전까지 쭉 그 집에 살았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고 좋아했던 어린 마음만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런데 집을 떠나면서부터는 이사가 일상이 되었다. 작게는 기숙사 내의 방 이동부터, 지금은 익숙해져버린 1톤 트럭 용달 이사까지. 몇 개월, 1~2년을 주기로 여러 동네의 각종 주거 형태를 전전하면서 동서남북 서울의 지리를 익혔다.

1톤 트럭을 가득 채운 이삿짐.

02

이삿짐을 싸면서 발견한 것이 많다. 다 내 물건이라고 해도 쓰는 것만 쓰고 반 이상은 다음 이사까지 거들떠도 안 보는 그냥 ‘짐 덩어리’다. 그중 편지 뭉텅이와 옛날 공책들이 재미있었다. 친구들이 준 편지에는 시시콜콜한 일상부터 생일 축하, 퇴사 축하, 고민 상담, 응원 등등 여러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것들에 어떤 답장을 보냈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게 부끄럽고 편지를 준 마음들이 고마워 한참을 웃었다. 전에 쓰던 공책에는 지금은 귀엽게만 보이는 미래 계획, 다짐들이 빼곡했다. 그걸 보니 지금 쓰는 공책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미래가 뻔히 보여서 즐거웠다.  


올 때처럼 다시 텅 빈 방.

03

며칠 전, 또 한 번의 이사를 했다. 짐 싸느라 바빠서 감상에 젖을 여유도 없었는데, 차를 타기 전에 마지막으로 텅 빈 집을 둘러보다가 마음이 이상해졌다. 각종 집기가 집안 빼곡히 쌓여 있던 공간이 휑해서 낯설었고, 더이상 그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데에서 아련해졌다.

1년 반을 살았던 집과 시장, 치킨집, 놀이터, 출퇴근 동선, 산책로... 모든 장소에 신물이 날 때가 있었는데 이젠 “옛날에 거기서 ~~했었는데~” 하는 추억의 장소가 될 거라고 생각하니 또 재밌었다. 죽음을 전제할 때 삶이 가치 있어지는 것처럼 과거가 될 것을 전제할 때 현재가 가치 있어지는 마법이다.

이번에 이사 온 집도 언젠가는 내가 살았던 집 한 곳에 불과해지겠지만 또 이 장소에 딸린 다채로운 추억 뭉텅이가 생길 거라고 생각하니 이곳 생활도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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