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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한 Jan 04. 2019

<삼삼한 이야기> 그 219번째 끈

새벽과 미소

01 새벽에 생각하다

새벽에 생각하다
천양희 시인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노트르담의 성당 종탑에 새겨진 '운명'이라는 희랍어를 보고 「노트르담의 꼽추」를 썼다는 빅토르 위고가 생각나고 연인에게 달려가며 빨리 가고 싶어 30분마다 마부에게 팁을 주었다는 발자크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인간의 소리를 가장 닮았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가 생각나고 너무 외로워서 자신의 얼굴 그리는 일밖에 할 일이 없었다는 고흐의 자화상이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어둠을 말하는 자만이 진실을 말한다던 파울 첼란이 생각나고 좌우명이 진리는 구체적이라던 브레히트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소리 한 점 없는 침묵도 잡다한 소음도 훌륭한 음악이라고 한 존 케이지가 생각나고 소유를 자유로 바꾼 디오게네스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괴테의 시에 슈베르트가 작곡한 「마왕」이 생각나고 실러의 시에 베토벤이 작곡한 「환희의 송가」도 생각난다 새벽에 홀로 깨어 있으면 마지막으로 미셸 투르니에의 묘비명이 생각난다 "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배나 많은 것을 내게 갚아주었도다 고맙다 나의 인생이여"


02 미소

사우나를 하고 나오는 길은 출출하다. 단내에 이끌리듯 군고구마를 사러 갔다. 지갑엔 현금이 백 원도 없었지만 무작정 계좌이체를 해드려도 되냐고 여쭸다. 군고구마 아저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쉽게 돌아섰다. 아쉬움을 지우며 걷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 아가씨~”

아저씨는 군고구마를 종이봉투에 담아 건네주시며 말했다. “언제든 생각 나면 줘요, 돈은.”

감사함과 미안함이 겹치는 우리의 얼굴을 마주한 아저씨의 얼굴은 받는 사람보다 환했다. 새해 첫날에 얻은 아름다운 미소였다.

새벽, 작은 걸 나누기 좋은 시간.


03 새벽에 생각하다

새벽은 감상에 젖기 좋은 시간이다.

고독, 아쉬움, 회한, 그리움, 슬픔, 걱정 같은 마음이 곧잘 떠오른다. 그렇지만 오늘은 보석처럼 빛나는 미소 같은 것들을 떠올려본다. 맥주, 와인, 소주 같은 것들을 나눠 마시며 함께했던 새벽의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오늘 보았던 미소들을 떠올리면서, 내일은 더 많이 웃으리라 다짐하면서, 옆의 사람들에게도 미소 지을 일이 많이 생기길 바라면서. 새벽은 아름다운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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