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삼한 이야기> 그 54번째 끈

기억에 관한 세 가지 사설

by 수수한

01 망각

인간이 가진 축복같은 능력.

이것 덕분에 인간은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기억이라도 언젠가는 잊혀질 거라고 다독일 수 있는 이유.

그러나 잊고싶지 않은 기억도 저편으로 사라지고, 잊혀지기 싫은 이도 잊혀지는 이유.



02 형광펜

신문을 읽을 때, 좋은 문장이나 한 번 더 읽으면 좋을 소식에 밑줄을 긋는다.

어쩐지 펜으로는 눈에 띄지 않아서 형광펜으로 쓱쓱 긋는다.

일주일 전부터 형광펜이 보이질 않아서 사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잊어버렸다.

문구점 앞을 지날 때마다 '아! 형광펜. 이따 오면서 사야지.'

형광펜은 또 잊혀진다.

그렇게 내 신문에는 볼펜 자국만 남게된 지 오래라는 슬픈 이야기.

쓸데없이 저 문장에 형광펜 칠을 하고 있다는 더 슬픈 이야기.



03 기억

나는 이기적이라 나를 잊는 사람들을 원망하면서 내가 잊는 사람들에 대해선 유념하지 않는다.

종종 생각이 나도 금방 잊는다.

그런데 유별난 한 기억이 있다.

잊고 살아도 그 '종종'이라는 텀을 두고 기억의 샘을 비집고 올라오는 한 장면.

초연한 척 했지만 어린 나는 친구들이 필요했고, 별 감정이 없어서 더 비겁했다.

잔인했던 어린 날이 생각나면 그 얼굴들과 어떤 순간의 장면이 천천히 보인다.

이런 기억은 망각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다.

평생에 걸쳐 부끄러워할 어떤 기억들은 잊혀지지 않는 편이 낫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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