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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수한 Mar 19. 2017

품어내는 블랙, 지켜내는 블루

영화 <문라이트>

ⅰ 말 없는 아이

이미지 출처 : huffingtonpost

도통 말이 없는 아이들이 있다.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아니 이해는 하는 건지, 표현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내가 아는 아이도 그랬다. 

“우리 오늘 학교 끝나고 뭐할래? 우리 집에서 영화 볼래? 아님, 만화책 빌리러 갈까?”

그 아이는 눈도 잘 맞추지 않고 대답하곤 했다. 

“어… 난 상관없어.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의사 표현만이 아니었다. 좋다, 싫다를 말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말이 없는 아이는 입보다 눈이 더 바빴다. 표정과 분위기를 살폈고 사족 없이 필요한 말만 했다.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지만, 쉽게 변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인가 아이는 털어놓았다. 

“나는 내 감정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을, 언젠가는 변하고 말 것들을 말하고 싶지 않아.”

물렁한 줄 알았던 그 아이는 누구보다 단단했다.



ⅱ 의자가 움직일 때

이미지 출처 : huffingtonpost

학교의 말썽쟁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도 움찔할 뿐, 의자를 빼고 달려들 생각도 하지 않던 샤이론이 어느 날의자를 들어올린다. 참지 못할 그의 분노를 담아 내리 찍는다. “그만해.”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던 소년이 의자를 들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치욕적인 순간은 많았지만 그것이 이유는 아니었다. 마음을 나누던 유일한 친구 케빈이 자신의 전부가 된 이튿 날, 케빈은 자신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케빈의 의지가 아니라는 게 상실감을 달래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의자를 들어올린다. 


샤이론이 교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의자를 들어올리던 순간, 정말 내리치고 싶었던 건 그 자신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맞아 피를 흘려야 하는 샤이론 자신이었을 것이다. 바지가 왜 이렇게 작냐고 왜소한 몸을 지적받을 때도, 마약에 찌든 엄마를 모욕당했을 때도, 샤이론은 달려들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은 일엔 일찌감치 무심한 눈길을 보내는 데 익숙한 소년이었다. 



ⅲ 품어내는 블랙, 지켜내는 블루

이미지 출처 : huffingtonpost

의자를 들었던 단 한순간으로 그의 인생은 변한다. 힙합 음악을 들으며 매끈한 자동차를 몰고 자기의 구역을 관리하는 근육질의 마약 판매상. 샤이론은 더 이상 '리틀'이라 불렸던 소년이 아닌 것 같다. 케빈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근 10년 만에 케빈의 전화를 받고 얼음이 가득 담긴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어내는 샤이론에게서 왜소한 소년 샤이론이 중첩되어 보인다. 


케빈을 만나러 가는 길, 그는 엄마를 먼저 만나러 간다. “쳐다보지 마!”라고 소리를 지르는 엄마의 꿈을 꾸지만, 엄마는 지금 늙고 왜소하다. 자신을 만나러 와달라고 애처롭게 말하는 엄마를 보는 그의 눈은 슬프다. 독기도, 세상을 향한 증오도 사라지고 손에 든 담배밖에 가진 것이 없는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는 그의 눈은 슬퍼 보인다. 한 번도 자신의 눈물을 닦아준 적 없는 엄마의 눈물을 닦는, 담배에 불을 붙여 손에 쥐어주는 샤이론은 그의 피부색을 닮았다. 모든 것을 품는 검은 색을 닮았다. 


케빈과의 조우. 케빈은 불을 피워 따뜻한 요리를 만들어주고 물을 끓여 차를 대접한다. 그리고 묻는다. 

“너는 누구야?” 

샤이론은 누가 되었을까. 괴롭힘을 피해 마약 창고에 숨어들어간 말 없던 아이에게 밥을 주고, 파란색 물에 그를 띄워주었던 아저씨? 

파란색이 되고팠던 샤이론은 이렇게 말할 뿐이다. 

“너 말곤 아무도 없었어.”

말 없던 아이의 작은 고백은 파랑의 색으로 두 사람을 묶는다. 


<문라이트>는 친절하지 않다. 관객의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다만, 화면을 수놓는 파랑이 관객에게 스며들 수 있게 빗장을 끌르는 힘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당신이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마음 속에 꼭 지키고 살라고. 단 하나의 불씨는 남겨 놓으라고. 그러면 그 불씨는 꺼지지 않고 언제든 다시 타올라 당신의 삶을 덥혀줄 수 있다고.


인간은 색깔을 닮으려 한다. 색에 의미를 담는 것도 인간인데, 인간은 인간에서 벗어나 색깔이 되려 한다. 그리고 마음 속 파랑을 지키고 살던 어떤 사람은 붉은 사랑 앞에서 비로소 파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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