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수를 제공받지 못한 자, 샤워를 포기하라
집 떠나온 지 나흘 째, 네팔에 도착한 지 사흘째. 드디어 본격적인 트레킹 시작의 날이 밝았다. 지난밤 룸메와 나는 일찍 잠자리에 눕느라 호텔 옥상에 다녀오지 못했는데, 옥상에 다녀온 대원들이 아침에 눈 뜨자마자 풍광을 꼭 봐야 된다며 일러주었다. 다음날 룸메와 함께 이른 시각에 일어나 커튼을 걷는 순간, 내 눈앞에 믿기지 않는 뷰가 펼쳐졌다.
아, 그냥 말이 안 나왔다. 내가 살면서 이런 광경을 직접 볼 줄이야!
일출의 오묘한 분홍빛을 받은 안나푸르나 그리고 마차푸차레가 보이는 이 장면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 좋게도 옥상에서 볼 수 있는 뷰를 실내에서 볼 수 있는 방이었기에 우리는 창문을 열고 나가 분홍빛이 희미해질 때까지 산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여유도 잠시, 우리는 트레킹을 하러 일찍 떠나야 했다. 짐을 다 패킹하고, 호텔 식당에 내려가 조식을 먹었다. 음식들은 꽤나 맛있었다. 팬케이크에 꿀을 바르고, 소시지와 야채를 얹어 먹으면 그야말로 천국이다. 앞으로는 롯지식 밖에 먹지 못한다는 생각에, 욕심내어 이것저것 더 많이 퍼서 먹었다. (하지만 롯지 음식도 다양한 메뉴로 구성됐고 트레킹 내내 무척 맛있게 먹었다.)
개인 배낭을 메고, 우리는 나야풀에 가기 위해 지프차에 몸을 실었다. 포카라가 ABC 트레킹의 입성지였다면, 나야풀은 시작점이라고 보면 된다. 트레킹 첫 번째 날은 나야풀 > 힐레 > 티케둥가 > 울레리(1,960m) 총 4시간의 코스였다.
약 1시간가량 지프차를 타고 힐레에 도착했다. ‘아, 이제 진짜 트레킹 시작인 건가!’ 힐레에 오니 비로소 안나푸르나에 왔음이 실감이 났다. 푸르른 산맥을 벗 삼아 걷게 될 여정에 설레기도 하면서 고산병이 오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 두 감정이 교차했던 힐레에서의 시간이었다. 안전부장의 구령 하에 다 같이 모여 스트레칭을 하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히말라야’라고 하면 눈보라가 몰아치고 수염이 얼고 추위에 몸을 못 가누는 장면을 많이들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네팔은 다양한 고도와 동서로 넓은 지역을 커버하고 있어 열대에서 눈에 이르는 8개의 기후대를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네팔은 한국보다 저위도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날씨가 꽤나 더운 축에 속한다. 때문에 저고도를 트레킹 할 땐 땡볕과 맞서 싸워야 했다.
나야풀에서 울레리까지의 날씨는 실제로도 굉장히 더웠다. 고어텍스 재킷을 입고 갔지만 대원 대부분은 재킷은 가방에 걸고 올라갔고, 안에 입는 기능성 티도 기모가 있는 티를 입었던 대원은 첫날 꽤나 고생을 했을 거다. (하지만 낮과는 달리 울레리에서의 밤은 꽤나 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 오르지 않아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말로만 듣던, 영상에서만 보던 롯지식을 처음 체험해보는 날이었다. 미국 서부 로드 투어를 했을 때 롯지에서 숙박했던 적은 많았지만, 롯지식을 제대로 먹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말해 뭐해, 내 입맛과는 꼭 들어맞았다. 어렸을 적 펜팔을 주고받던 네팔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느낌이 들었을 정도로 입맛에 잘 맞았다. (그렇다고 펜팔을 주고받진 않았다.)
가이드 시리한테 들어보니,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루트에 위치한 롯지에서는 메뉴가 전부 다 통일되어 있다고 한다. 시누와, 촘롱을 제외하고 모든 땅이 국유지기 때문에 중앙에서 재료를 공급받아 음식을 제공하고, 덕분에 일원화된 메뉴로만 제공하는 시스템이라고 설명해주셨다. 그렇다는 말은 시누와와 촘롱은 유일한 사유지로 롯지에서 자체적으로 음식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김치찌개, 김치볶음밥 같은 한식 메뉴와, 기력을 회복하기 위한 닭백숙, 뿐만 아니라 직접 한국 쌀을 수입해서 조리하기 때문에 쌀맛도 다르다고! 사실 나는 이때부터 시누와에 도착하게 될 순간만을 고대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아무쪼록, 베테랑 가이드 덕분에 트레킹 하면서 네팔에 대해 이것저것 주워들은 게 많아서 더 재밌었다.
밥을 먹으며 만났던 트레킹 동지들도 참 반가웠다. ABC 트레킹을 가는 길은 하나였기 때문에 중간중간 만났던 팀은 우리와 뜨거운 열정을 함께 나눌 멋진 동료가 되었다. 첫날 점심 식사를 같이 했던 멋진 친구 마리오도 다른 롯지에서 만났던 적도 많았고, 푼힐에 올라가서는 같이 사진도 찍고 즐거운 추억도 남길 수 있었다. 국가, 사회, 배경을 모두 벗어던지고 ‘트레커’로 만났던 이들을 보며 동기부여도 많이 얻었고, 그들의 도전과 삶의 방식에 많은 부분 영감을 배울 수 있었다.
울레리까지 올라가는 길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아직 고도가 낮아 본격적인 설산이 시작됐던 건 아니었지만, 저 멀리 보이는 마차푸차레가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끝없이 펼쳐진 산들을 보며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원래 자연보다도 도시를 선호하던 나였는데, 이번 기회가 스스로를 많이 바꿔놓았다고 생각한다. 펼쳐진 자연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걷는 시간들이 좋았고, 옆에 있는 대원들과 사사로운 얘기로 웃고 떠드는 순간들이 참 소중했다.
다행히 늦지 않은 시간에 울레리에 도착했다. 낙조가 지기 전 울레리의 모습도 카메라에 열심히 담아보고, 노을도 보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중간에 웃긴 해프닝도 있었는데, 사건의 발단은 할당된 온수로 모두가 샤워를 할 수 없다는 것에서 시작됐다. 야심 차게 가위바위보 내기를 걸었지만 결국 꼴찌를 한 나는 당일 샤워를 못한 대원 중 2명에 포함됐다. (원래 나 혼자였지만 물이 생각보다 일찍 끊기는 바람에 앞 대원도 샤워를 못했다.)
땀도 많이 흘려서 꿉꿉했지만, 서서히 해가 지고 찬바람이 불며 땀이 마르니 이 날씨에 샤워를 한다는 게 더 고통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 히말라야에서는 꿉꿉함과 맞서 싸워야 한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룸메와 여행노트를 들고 나와 공용 테이블에서 끄적이기도 하고, 공항에서부터 읽었던 어린 왕자를 펴서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대원들과 진지한 대화도 하며 첫 트레킹 하루를 마무리했다.
소개가 늦었지만, 이번 트레킹을 준비하며 대원들과 <여행노트>를 제작했다. 하루 별로 하나의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롯지에 도착해 밥을 먹고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 보면 어느새 하나둘씩 로비 테이블로 여행노트를 들고 모였다. BGM을 하나 선정해 노트의 질문을 답하고, 그 답을 대원들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누군가 보면 오그라들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그 시간들로 인해 서로를 배웠고 서로의 진심을 통해 스스로를 한 뼘 더 성장시킬 수 있었다고 믿는다.
울레리까지의 길지 않은 코스였지만 처음 맛보는 히말라야의 풍광과 공기는 무척이나 강렬했고 아름다웠다. 크로커스 원정대, 1일 차도 정말 수고했고 안나푸르나까지 열심히 가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