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젓한 시골살이를 꿈꾸며 시골집 리모델링 준비를 시작하던 어느 날. 귀농귀촌 카페에서 놀랄 만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옆 집 할머니가 하루에도 몇 번씩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다는 이야기. 마을에서 왕따를 당한다는 이야기. 마을 주민들이 집 공사를 반대해서 싸움이 났고 결국은 칼부림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 외에도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후 시골생활을 포기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들이 종종 보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다들 입을 모아 시골살이가 쉽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왜 이런 이야기들은 항상 일을 저지르고 난 후에야 보이는 걸까. 후회해봐야 늦은, 시골집 계약이 이미 끝나버린 시점이었다.
걱정으로 여러 날을 보내다 시골집에 들렀던 날이었다.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리는 순간, 여러 개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마을에 못 보던 차가 들어섰기 때문일 것이다. 귀촌 카페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무조건 인사를 잘해야 한다고 했다.
“안녕하세요, 이 집 고쳐서 들어오는 사람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카페의 이야기처럼 지나친 박대를 받으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반대로 6시 내고향 같은 환대를 받으면? 양쪽 다 고민이었다. 걱정과 달리 대답 없는 가벼운 목례만 돌아왔다. 나는 다시 꾸벅, 하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 같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순간, 담장 너머로 넘어오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마을의 모든 눈이 우리집을 향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날 나는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내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마을의 핫이슈가 되었고, 공사를 시작한 우리집은 마을의 핫플이 되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오며 가며 공사 중인 우리집에 들르셨다. 우리집에 과거에 어떤 사람이 살았는지, 본인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시는지, 뒷뒷집과 옆옆집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를 한참 이야기하고 가시곤 했다. 나는 늘 비슷한 이야기를 새로운 버전으로 들었다. 동시에 내 이야기도 궁금해하셨다. 왜 갑자기 시골에 왔는지, 서울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지, 결혼은 했는지, 왜 안 했는지, 이 마을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를 매번 같은 버전으로 이야기했다. 그만 듣고 그만 말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지만 카페에서 본 무서운 에피소드들이 현실이 될까, 내 안의 싹싹함을 총동원했다. 그래서 대화가 끝나면 항상 진이 빠졌다.
가장 적응이 어려웠던 것은, 내가 마당에서 무언갈 하고 있으면 마을 어르신들이 불시에 어디선가 나타나셔서 꼭 한 마디씩 하시는 것이었다. 한 번은 무너진 돌담을 다시 쌓고 있었다.
마을 어르신 1 : 에이, 그렇게 하면 절대 안 돼. 여그다가 황토를 으깨 갖구 해야지.
나 : 흙을요?
마을 어르신 1이 가시고 난 후,
마을 어르신 2 : 클났네, 클나. 돌담 다 무너져!!! 이렇게 쌓아서 여기다 쎄멘을 부어야제. 이런 거 처음 해보제?
나 : 시멘트요?
마을 어르신 2가 가시고 난 후,
마을 어르신 3 : 돌을 이렇게 뒤집어 갖고 돌이 서로 교차되게. 어? 그래야 그 힘으로 서로 버티는겨.
나 : 네..
내가 꿈꿨던 시골살이란 하루 종일 혼자 담장을 이렇게도 쌓았다가 저렇게도 쌓았다가 하는 고요한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라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충분한 생활. 순간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냥 서울집에 가고 싶다..’
서울집에서는 현관문을 닫고 집에 들어가면 이웃과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 불행하게 주차문제나 층간소음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앞집, 윗집, 아랫집에 누가 사는지- 알고 살 일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온 마을이 나를 향해 말을 걸고 나 역시도 그래야 하는 것이었다. 불편하고 힘든 마음으로 얼마 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생각보다 원초적인 계기로 해소되었다. 시골집 공사가 한창이던 어느 날,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졌다. 보통은 오기 전 휴게소에서 다녀오고, 식사하러 식당에 갔을 때 해결하곤 하는데- 그날 목이 말라 많이 마신 음료수가 문제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웃집에 발을 들여놔야 했다.
“계세요? 저.. 옆집인데요. 화장실 한 번 쓸 수 있을까요?”
갑자기 들어와 화장실 이야기를 하는 것도 껄끄럽고, 최근 이 집 어르신 말씀을 듣는 둥 마는 둥 해서 마음이 영 불편했다.
“화장실? 이 쪽. 저 문이여.”
“저 근데.. 흙이랑 먼지가 많이 묻어서요. 마당에 푸세식 화장실 써도 되는데요.”
“서울 아가씨가 푸세식 화장실을 어떻게 쓴다 그려. 흙 한 번 훔치면 되지. 신경 쓰지 말고 편히 써. 대문이랑 열려 있으니까 사람 없어도 와서 쓰고.”
그 후로 나의 방광도 다소 뻔뻔해졌는지 자주 인내심을 잃었다. 그때마다 나는 앞집, 옆집, 뒷집을 돌아가며 화장실을 해결했다. 그쯤 되자 마을 어르신들은 화장실도 없는 내가 먹을 건 있겠냐며, 새참을 들고 우리집을 오가셨다. 그리고도 모자라 우리집 공사를 맡아주시는 사장님을 집으로 초대해 식사대접을 하기도 하셨다(고 시공업체 사장님께 들었다).
이런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앞집 할머니는 60년 전에 이 마을로 시집 온 후, 마을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으시다고 했다. 예순 중반의 옆집 어르신은, 젊은 시절 잠시 마을을 떠나 몇 년 간 서울살이를 하셨는데- 몇 년 만에 다시 돌아오셨다고 했다. 마을 대부분의 어르신이 이렇다.
나는 (서울에서) 지금 사는 동네에 10년 가까이 살았다. 2년 혹은 3, 4년마다 이사를 해야 했지만 고작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한, 두 블록을 옮기는 이사였다. 토박이는 아니지만, 눈에 익은 건물과 가게들이 많다. 출퇴근길 매일 지나는 오래된 식당도 그중 하나다. 얼마 전부터 그 식당을 헐고 공사를 시작했다. 나는 그 식당이 무엇으로 바뀔지 궁금해서 며칠 내내 힐끔거렸다. 만약 내게 조금의 넉살이 있었다면, ‘여기 뭘로 바뀌는 거예요?’라고 슬쩍 물었을 것이다.
10년 산 동네에 오래된 가게가 바뀐다니, 길을 지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간다. 공사가 얼마나 진행됐나 싶어 돌아가는 길인데도 일부러 그 길로 간 적도 있다. 그런데 평생 산 마을, 그것도 마을 한가운데 위치한 집에 낯선 이가 든다니 그 신기함과 걱정이 오죽하실까. 내가 마을의 핫이슈가 되고, 우리집 마당이 핫플이 되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낯설고 어색한 관계가 순식간에 편해지지는 않았다. 이 관계에는 다른 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했다. 정겹게 색이 바랜 풍경화 속에 혼자만 새로 그려넣어진 새처럼, 어색한 선명함이 사라질 시간이 말이다. 나는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그저 편히 있자고 다짐했다.
내가 이 마을에 들어오고 또 한 가구가 새롭게 마을에 정착했다. 조용하고 별일 없는 마을에 자주 없는 별일인 것이다. 그러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나도 자꾸만 그 집 담장을 기웃거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