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집 할머니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는데 전화가 울린다. 차량 블루투스 모니터에 앞집 할머니라는 글자가 보였다. 동네에서 내가 최고로 좋아하는 앞집 할머니 전화다.
“여보세요. 할머니이!”
“으이!”
할머니는 항상 응, 대신 ‘으이!’ 하고 기합을 넣듯 답하신다.
“아직 안 주무셨어요?”
힐끗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었다.
“초저녁에 잠들었다가 잠깐 깼네. 지금 오는 중이여?”
“네. 사십 분 정도 더 걸릴 것 같아요.”
무슨 일이 있으신가, 잠시 걱정이 스쳤다.
“큰 질로 와. 앞히 공사 끝났은게. 뒤로 오지 말고 존 질로 오라고(큰 길로 와. 앞에 공사 끝났으니까 뒤로 오지 말고 좋은 길로 오라고).”
“…”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몇 주 전 금요일 밤. 자정이 다 되어 마을에 도착했을 때였다. 반가움과 안도감으로 마을 입구를 지났는데, 갑자기 진입금지 표지판을 만났다. 우리집까지 이어지는 길이 펜스로 둘러져 있었다. 다가가 보니 울퉁불퉁했던 마을길이 반듯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시멘트가 다 굳을 때까지 통행이 불가능한 것 같았다. 집이 지척에 보이는데 들어갈 수 없다니. 게다가 항상 다니던 길은 그 길 뿐인데. 어쩌지, 하며 잠시 길 위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차 안에서 소망이가 얼른 내려달라며 야옹거리기까지 했다.) 생각해보니 반대쪽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작은 길이 있긴 했다. 차 한 대면 꽉 차는 좁은 길이라 후진으로 느릿느릿 차를 뺐다. 그리고 마을을 둘러 겨우 집에 도착했다. 이 날 이야기를 할머니께 했었다. 할머니는 전화를 해줄 것을, 정신이 이렇게나 없다면서 속상해하셨는데 나는 별스럽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오늘.
“건너다 보니께 집에 아직 불이 안 켜졌잖여. 지금쯤 올 때가 되았다.. 싶어서 얼른 전화했지! 아이구, 지난번에는 내가 아주 정신을 놓고.. 전화를 해 줄 것을. 밤중에 얼매나 고생스러웠을까.. 얼매나 맘이 안 좋았던지. 오늘은 존 질루 와, 잉?”
이 늦은 밤, 창가에 서서 우리집을 건너다볼 할머니의 모습이 그려졌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너무 따수워서 찔끔 눈물이 났다.
따숩고 따수운 앞집 할머니는 나의 농사 선생님이기도 하다. 처음 텃밭을 가꾸기 시작했을 때는 무엇이든 인터넷에 검색해보려고 애썼다. 매일 농사일로 바쁜 어르신들께 또 농사를 여쭙는 게 죄송스러워서다. 문제는 파종시기였다. 충남 금산은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이 접하는 곳이다. 행정구역은 충청남도지만 차를 타고 10여 분만 달리면 바로 전라북도가 나온다. 보통 이 두 지역의 작물을 심는 시기엔 차이가 있는데 금산에서는 그 중간 시기에 심는다. 시골에 온 첫 봄에는 그걸 모르고 어느 한쪽 지방에 맞춰 심어서 서리를 맞히거나 작물이 늦자랐다. 그 후로 나는 동네 어르신들께 의지하기 시작했다. 특히 앞집 할머니께 말이다. 이곳에서 이 계절을 수십 번을 지나온 사람이 갖는 감각을, 인터넷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집 배추도, 무도, 고구마도- 모두 할머니 손길을 거쳤다. “할머니, 저 고구마 심으려고 하는데요.” 하고 쭈뼛거리면, 할머니는 어느새 우리집 마당에서 허리를 굽히고 시범을 보이신다.
동시에 할머니는 나의 브런치메이트다. 보통은 전날 밤에 전화로 약속을 잡는데, 제철에 수확한 작물로 만든 음식을 나눈다. 사실 나눈다기보다 할머니의 일방적인 베풂이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할머니와의 브런치는 절대 가볍게 끝나지 않는다. 메인을 기본 세 그릇은 먹어야 후식으로 넘어갈 수 있다(내 그릇이 비워지기도 전에, 그릇을 채워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기 때문). 프랑스 사람들처럼 길고 긴 브런치를 나누며 이야기 꽃을 피운다. 할머니는 20대에 이 마을로 시집오셨고, 그 후로 60년이 넘게 이곳에서 살고 계신다. 슬하에 열두 명의 자녀를 두셨다. 처음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금슬이 좋으셨나 봐요.’ 하자, 얼굴을 붉히시며 손사래를 치던 소녀 같은 할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젊은 시절에는 인삼 장사를 하시며 전국의 여러 곳을 다니셨는데-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낸 춘천에도 자주 오셨다고 했다. 내가 살던 동네의 버스 노선까지도 꿰고 계셔서 깜짝 놀랐다. 할머니가 젊었을 때, 내가 어렸을 때 우리가 어쩌면 마주치지 않았을까, 우리는 그런 이야기하며 웃기도 했다.
문득 할머니의 이름이 궁금해진다. '앞집 할머니' 말고 할머니의 진짜 이름. 이번 주말에 할머니를 만나면 여쭤봐야지, 하고 오늘도 할머니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