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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사이로 Sep 23. 2021

담을 넘는 호박들

옆집 밭과 우리집 밭 사이에는 야트막한 돌담이 있다. 그런데 작년 어느 날부터 옆집 호박 넝쿨이 돌담을 타고 넘어오기 시작했다. 호박 넝쿨은 스물스물 담장을 넘더니 결국 우리집 마당 한 켠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저기, 어르신... 호박넝쿨이 저희 집으로 넘어와서요."

"근디?"

"거기서 호박이 열렸는데요."

"그래서?"

"따서 드릴까요?"

"그 짝 집으로 넘어갔으면 그 짝집 호박이지!"


어르신은 당연하다는 듯 말씀하셨고 나는 조금 창피해졌다. 호박 덩굴손이 열심히 가꾸고 있는 장미 꽃대를 휘감거나 키 작은 꽃들을 짓누를 때면 꽤나 싫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옆 밭까지 넝쿨이 뻗치면 정리하셔야지, 왜 마냥 두시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2년 차 시골사람이 되어 돌이켜보니 호박의 특성과 시골살이를 몰라서 먹었던 못난 마음이다. 호박은 반나절만 두어도 어디든 타고 올라간다. 뿌리가 있는 집에서 넝쿨을 거두어주는 작업이 필요하지만 호박이 담을 넘는 게 싫다면 우리 밭에서도 호박넝쿨을 정리해주었어야 한다. 그리고 시골에는 니 것, 내 것도 있지만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은 것도 많다. 넓은 곳에 걸쳐서 잘 자라는 호박을 서로의 담장에 기대어 키우고 우리집에 열리면 우리집 호박, 옆 집에 열리면 옆 집 호박으로 치는 신기한 셈법이 존재하는 것이다(옆 집 어르신은 그 후로도 우리집 쪽으로 열린 호박은 꼭 그 짝집 호박이라고 부르셨다).


그날 이후, 정말 끝도 없이 호박을 먹었다. 호박찌개, 호박전, 호박볶음, 호박잎 쌈밥. 호박으로 할 수 있는 요리가 이렇게나 많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런데도 먹는 속도가 열리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호박고지를 만들어 겨우내 먹기도 했다.


그리고 올해 초 여름. 우리집 텃밭에 심지도 않은 호박이 자라기 시작했다. 나는 옆집 어르신께 호박허세를 부렸다. 올해는 내가 호박을 키워 넝쿨을 넘겨드릴 테니 이제 따 드시기만 하면 된다며. 그런데 웬일인지 호박넝쿨이 내내 비실비실하고 있다. 엄지 손가락만 하게 호박이 열렸다가도 그다음 주에 보면 말라서 똑 떨어져 버리는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옆 집 텃밭을 힐끔거려 보았다.


다행이다. 올해도 반대 편 담에서 호박넝쿨이 슬금슬금 우리집 담장을 넘을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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